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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국내여행

밤 기차로 떠나는 추억의 아날로그 여행




 

 

 

이번 소백산 탐화행은 야간열차를 이용해 보기로 했다.

작년 딱 이맘 때 같은 여정으로 아들과 한 번 다녀온 터라 

무박 2일 시간대별 일정은 머리속에 이미 다 그려져 있고, 

동행하기로 한 지인들에게 야간열차行을 제의하니 모두 흔쾌하게 동의한다.






2013. 5. 4. ~ 5. 소백산.









<호계역 대합실>









왕복 기차표는 사흘 전 예매해 두었다. 

사무실에서 가만히 앉아서도 몇 일 후 기차편을,

그것도 입맛에 맞는 자리를 골라 미리 선점할 수 있는 디지털 환경이 

나중 이야기 할 아날로그 여행의 컨셉과는 배치되면서도 

그걸 더욱 가능하게 해 주는 

아이러니의 시대에 우린 살고 있다. 

 

토요일 저녁, 마트에서 간식, 기호품 등 간단한 장을 봐 배낭에 꾸려 넣고

식구들과 느긋한 밤 시간을 보낸 뒤, 모두들 잠들 무렵 쯤 어슬렁어슬렁 집에서 빠져 나와

약속했던 시간, 인근의 호계 역으로 모여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가벼운 흥분을 느낀다. 

우리들의 작은 일탈의 음모(陰謨)가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다!


시원한 밤 공기 냄새를 맡으며 플랫폼에 서서 기차를 기다리는 기분도 특별하다.

 

조금 연착한 23:58 발 청량리행 무궁화 열차에 몸을 싣는다.

배정된 좌석을 찾아 가 배낭 등을 선반 위에 올려두고

준비해 온 맥주와 소주, 종이컵, 안주 등을 꺼내 들고

까페칸으로 자리를 옮겨 우리들만의 조촐한 심야 파티를 열었다.
















기차 벽면에 붙은 일자형 테이블이라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야밤 음주의 정취를 느끼기엔 그리 부족함이 없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한 모금씩 홀짝거리다 보니

우리 3인 모두 특별한 주당들은 아닌데도

큰 캔맥주 3개, 소주 4홉들이 한 병이 금방 동이 나는구나.

어허 이럴 수가, 충분하리라 생각했던 술이 턱도 없이 부족하다.

 

식당칸의 판매원 언니는 어디로 퇴근 했는지 얼굴도 안보이고, 

음료와 술, 안주, 간식 따위가 들어 있는 쇼케이스는 모두 잠겨 있구나.

지나가는 차장 아저씨를 붙잡고 술을 내 놓으시오 했더니

매점은 다른 회사가 운영하는 것이어서 자기들은 손을 댈 수가 없다고 하네.

















술 떨어지니 야밤 여행의 흥도 급감하네. 제길.

아쉽지만 각자의 자리로 돌아 와 잠깐 눈을 붙이기로 한다.



노래 가사에도 많이 등장하는 "밤차"라는 단어는 묘한 설렘을 안겨준다.


특수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광속으로 달리는 우주선에는 시간이 느려지거나 흐르지 않는다고 하는데

칠흑같은 심야의 이동이야말로 진공과 암흑뿐인 우주 공간을 달리는 느낌이지 않는가?

한정된 시간이지만, 캄캄한 공간을 기차가 달리는 동안 만큼은

모든 것과 단절되고 유리된 채 내 존재 전체를 기관차에게 전적으로 의탁하여

시공을 초월한 여행 길에 오른 방랑자가 된다.  

그러니까, 시간이 정지한 공간에서의 여행이라는 이런 착각이 참 좋다.

비현실의 실체감이라고나 할까? 

모르긴 해도, 이런 기분은 선사하는 건 야간열차 밖엔 없지 않나?




깜박 잠들었다가는 내릴 역을 놓칠 수 있겠다는 일말의 불안감도 스릴로 다가온다.

그 뿐인가?

교통 체증 걱정은 아예 접어두고, 졸음 운전, 방어 운전 신경 꺼도 되고

술 퍼 마시고 고주망태가 되어도 음주운전 걱정 없으니 이 얼마나 푸근하며,

과속 카메라 걱정 없으니 또 얼마나 좋으냐? 


운 좋게 앞뒤좌석 비어 있으면 의자 등받이를 휙 제껴

두 다리 쭈욱 벋고 잘 수 있으니 비행기 일등석이 부럽지 않다. 


이런 푸근한 기차여행이야말로 

따뜻한 아날로그的 감성을 일깨워 주는 추억의 여행 아니겠는가? 





잡설 걷어 치우고

소백산에서 만난 꽃 이야기나 해 보자.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