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야생화

2017.04.15. - 남바람꽃과 반구정


     올해도 남바람꽃의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왔습니다. 해마다 4월 중순에 맞이하는 토요일은 남바람을 위해 비워 두는 것이 내 몇 안되는 꽃동무를끼리의 무언의 약속으로 굳은 지 제법 오래 되었는데 이번에도 그 날이 가까와지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일 장소를 정합니다. "무엇을?" 이 아닌 "어느 시각에, 어디서?"만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출발한 우리는 봄 기운 화창한 남녁의 고속도로를 달려 11시경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우리가 그리던 남바람꽃이 아니라 2겹, 3겹으로 쳐진 금줄입니다. 아, 작년에 이어 올해도 뭔가 쉽지 않을 거라는 느낌이 훅 드는군요. 그 곳엔 이미 7~8명의 탐화가(耽花家)들이 엎드려 꽃을 담고 있었는데, 다들 즐거운 표정이 아니라 뭔가 불만에 가득한 얼굴입니다. 그런 사진가들 바로 옆에서 이 곳을 관리하시는 아저씨는 계속 금줄 가설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차에서 내리는 우리를 본 관리 아저씨는 말뚝과 나무 사이에 새끼줄을 치다 말고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 대뜸 우리에게 이렇게 일갈하였습니다.


"저 위에 차량 출입 금지 푯말 못봤어요?"


     사실 아까 저 위 언덕에서 '반구정 차량 출입 금지' 라고 씌인 표식물은 언뜻 봤으나 이미 가파른 내리막으로 진입해버린 후여서 차를 돌리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일단 내려 가서 차를 돌리자는 생각으로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진행한지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요.




"아 예, 죄송합니다. 바로 돌려 나갈게요." 


       라고 대답해 놓고 보니, 이미 좁은 주차 공간을 먼저 온 차가 다 차지해버린 터라 돌릴 틈이 거의 나지 않는군요. 난감해 하고 있는 우리에게 탐화객 중 한 분이 곧 자기 차가 떠날테니 좀 기다렸다가 그 자리에 주차하라고 하는군요. 일단 다행입니다. 




     차에서 내려 꽃밭을 살펴 보니 사진 찍을 만한 장소는 대부분 접근을 허용치 않는 금줄 안의 세계가 되어버렸고, 진입로 옆에 겨우 핀 몇 무더기만을 내 주고 있었습니다. 특히 제법 조밀한 군락으로 피어나는 저 아래 계곡은 원천봉쇄되어 감히 넘볼 수도 없는 금단의 공간이 되어버렸네요. 금줄이 쳐지기 시작한 것은 작년부터였습니다. 그래도 작년엔 포토존이 이토록 좁게 설정되진 않았는데, 올핸 너무도 축소되어버렸군요.


     사실 몇 년 전부터 이런 예감은 있었습니다. 남바람이 절정인 시기만 되면 이 좁은 공간이 수많은 사진객들과 그들이 타고 온 차량으로 북적이다 보니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어느 정도의 훼손은 불가피한 일었습니다. 아무리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도 발 아래 짓밟히는 꽃들이 있기 마련이고, 이들이 썰물처럼 떠나간 자리에는 초토화까진 아니더라도 밟히고 꺾인 꽃이 부지기수로 널브러지니 이를 보는 이 곳 주인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심지어는 눈을 피해 몰래 캐 가는 사람까지 있다니...



      어쨌거나 여기 온 목적에 일단 충실하기로 하고 카메라를 꺼내어 모델 섭외를 해 봅니다. 얼짱 각도를 찍기 적절한 장소는 대부분 금줄 안의 구역이어서 언감생심입니다. 빨랫줄로 쓰이는 흰색 비닐 새끼줄의 3중 장벽의 심리적인 높이는 저 악명높은 청송 보호감호소의 담장보다 높았습니다. 그 와중에서 진입로 길바닥에 거의 엎어지다시피 누워 몇 컷을 어찌어찌 프레임에 넣어 봅니다.



탐방객들이 출입금지 푯말과 금줄 아래에서 선을 넘지 않으려고, 꽃을 다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 가면서 사진에 집중하고 있다. 

사진 위 금줄 끝에는 밧줄 공사 중인 관리인의 모습이 보인다.

(이 사진을 빌려주신 M兄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금줄 치던 아저씨가 이런 우리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저 쪽에도 몇 송이 찍을 만한게 있으니 그리로도 가 보라고 조언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는 본인도 참 안타깝다며 고충을 토로합니다. 재작년까지는 사진기 든 사람들에게 특별한 제지를 하지 않았는데 그러다 보니 너무 훼손이 심해지고 해마다 개체 수가 줄어들고 있는데 특히 저 아래 군락은 거의 다 죽어 없어지고 있다는군요. 사정이 이러하니, 본인으로선 이런 극약 처방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예 저 위 진입로에서부터 출입을 통제하기란 너무 야박한 일이어서 어쩔 수 없이 꽃밭에 새끼줄을 쳤다는 것인데, 공감이 가고도 남음이 있는 이야기죠.


     아까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한 분이 금줄을 비집고 넘어 와 사진을 찍고 있길래 좀 싫은 소리를 했더니만 "내 다시는 이 곳에 사진찍으러 오나 봐라"라고 악담(?)을 퍼 부으며 떠나버리더라는군요. 이렇게 말하고는 "아, 다시는 안 온다니 참으로 감사할 일이죠"라며 쓴웃음을 짓네요. 이 아저씨, 첨엔 까칠한 줄로만 알았는데, 속은 참 여린 분이었어요. 멀리서 어렵게 예까지 왔는데, 제대로 사진을 못 찍고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의 실망하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미안하더라는 말씀도 덧붙입니다. 


     우린 이 귀하고 예쁜 꽃을 잘 보전하며 더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결국 이는 개인이 해결하기는 어려운 문제이고, 관의 도움이 절실하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 반구정의 역사성, 문화재 공간으로서의 가치와 남바람꽃이라는 생태가치를 묶어 함안군의 자산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이야기지요. 이 곳과 가까운 장소에 남바람꽃의 일부를 이식하고 번식시켜 작은 생태 공원을 조성하여 사진객이나 탐방객을 그리로 유치하면 이 곳도 자연스럽게 보전할 수 있어 서로 윈윈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반구정과 연계해서 자연-역사 탐방로를 조성하면 함안 군의 문화 관광 자원으로서도 손색이 없을 거라는 거죠. 일단 이 문제에 대해서는 추후 내가 아이디어를 정리해서 함안 군청 홈페이지를 통해 제안하기로 했습니다. 




     더 이상 꽃을 찍는다는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사진기를 거두고 반구정 풍광이나 감상하고자 느티나무 노거수가 있는 반구정 마당으로 나가 보았습니다. 반구정은 북쪽으로 낙동강이 흘러가는 가파른 용화산 언덕위에 자리한 정자입니다. 동, 서, 북 삼면이 탁 트인 널찍한 마당에 우뚝 선 600년 이상 된, 수형이 매우 아름다운 느티나무엔 새 순이 파릇파릇 반짝이고 강 건너 저 아래 남지 벌판의 백만평이나 된다는 유채밭은 샛노랗게 만발한 유채꽃으로 가득하여 일대 장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조성도 할아버지께서 조성한 반구정 건물. 

알미늄 섀시에 유리로 비바람을 가리는 등 이 곳의 풍광과는 어울리지 않는, 다소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외형이 아닌 내면의 정신을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조만간 멋진 정자로 거듭 태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마침 이 곳을 수십년째 지키고 계신 어르신이 마당에 계서서 잠시 인사를 드리고 이 곳의 내력에 대해 여쭈어 보았습니다.


     이 어르신은 함안조씨 두암공파의 후손인 조성도라는 분입니다.  약 20년 전 이 곳으로 옮겨왔다는군요. 공직 생활을 정년으로 마친 후 부산에서 서예 교실을 운영하시다가, 쓰러져 가고 있는 반구정을 되살려야겠다는 사명감으로 이 곳에 정착하였습니다. 처음 왔을 땐 반구정이 오랫동안 방치되어 거의 폐가가 되다시피 한 상태였는데, 종인들을 찾아다니고 설득하여 당시로서는 거액인 수천만원의 기금을 모아 지금의 반구정을 재건하였습니다. 느티나무 아래엔 육각정이 있는데, 이는 할아버지의 건의로 함안 군청에서 조성하였답니다. 


멋진 느티나무와 함께 저 멀리 남지 철교가 보인다.

오른쪽의 저 산은 풍수학적으로 우백호에 해당하는 곳인데, 할아버지께서는 호랑이보다는 웅크린 사자의 형상에 더 가깝다고 설명하신다. 


함안군청에서 건축한 육각정. 

한 무리의 유객들이 육각정에 올라 자리를 잡고선 왁짜지껄 고기를 굽고 라면을 끓여 음주하는 등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행각을 하고 있어 조금 씁쓸했다. 조성도 어른의 허락이나 얻어 저러는건지?


     이 곳 내력에 관하여 할아버지께 들은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 반구정을 지은 분은 조 할아버지의 11대조 직계인 두암공 조 방이라는 분입니다. 두암공은 임란 때 곽재우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적에 대항해 싸우셨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난 후 다시 평범한 선비로 돌아왔는데, 주위 유생들이 두암공의 공적을 정리하여 조정에 상소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들을 조용히 불러 상소문을 가져오게 합니다. 두암공은 이 상소문을 불태워버리면서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고, 신하가 주군을 섬기고, 백성이 나라를 지키는 것은 지당한 일인데 어찌 이것이 스스로 자랑할 만한 일이더냐. 혹 내 죽은 후에라도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라" 라고 꾸짖었습니다.


     이 일이 결국 알려져 조정에서는 관직을 내리고자 했으나 끝내 사양하자 대신 용화산 일대의 땅을 하사하는데, 거기가 지금 이 곳입니다. 두암공은 여기에 정자를 짓고 갈매기와 함께 유유자적 노닌다는 뜻으로 반구정(伴鷗亭)이라 이름하였습니다.




     여기까지 듣다 보니, 반구정 기둥에 걸린 주련(柱聯)의 의미가 와 닿습니다. 여기 올 때마다 주련을 읽어보며 숨은 뜻이 무엇인지 100% 이해가 안됐는데, 이제 그 수수께끼가 풀렸군요.




洛水之陽名勝區(낙서지양명승구)

君恩許我此間遊(군은허아차간유)

囂塵不到閒翁耳(효진부도한옹이)

疎雨三更夢伴鷗(소우삼경몽반구)


낙동강 물 남쪽(=陽)에 빼어나게 아름다운 곳 있어,

주군의 은혜 입어 나 여기 한가롭게 노닐고 있다네

시끄러운 속세의 소리 이 늙은이 귀에 미치지 못하니

가랑비 내리는 삼경에 갈매기와 노니는 꿈 꾸었네.


     주련의 마지막에 이 곳의 이름이 된 '반구(伴鷗)'가 등장합니다. 저 주련의 7언시가 이 곳의 정신을 그대로 함축하고 있다고 봐야겠죠? 그런데 위 주련판을 자세히 보면 뭔가 이상한 느낌을 가지게 될겁니다. 즉 맨 왼쪽 주련판은 크기도 조금 작고 필치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죠. 사연인즉, 반구정을 재건할 무렵 왼쪽 끝의 주련판이 분실 또는 훼손되어 조성도 어르신께서 직접 쓰고 새겨 달았다는 것입니다. 조 할아버지께서 서예원을 직접 운영하실 정도로 글에도 조예가 깊으시니 가능한 일이겠죠.


    그리고 이 곳이 좌청룡 우백호에, 화왕산을 포함한 저 멀리 산군(山群)들이 연꽃 형상으로 둘러싸는 천하 명당이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굳이 풍수지리를 들먹이지 않더라고 반구정 마당에 서서 저 멀리 낙동강을 바라보고 있으면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 확 드니 과연 명당은 명당인 모양입니다. 이럴 때, 저 강 아래서 갈매기라도 몇 마리 비상해 오르면 얼마나 좋을까요?

 

서쪽 방향으로는 좌청룡이 누워있다.

     

노거수와 애기똥풀. 저 멀리 보이는 산군은 이 곳을 에워싸는 연꽃에 해당. 


         남바람꽃에 대해서도 여쭈어 보니 원래부터 이 곳에 자생하고 있었던 것인데 처음엔 그리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냥 무심했답니다. 그런데 예전 이 곳을 방문했던 모 교수가 남바람꽃을 발견하고는 할아버지께 아주 귀한 꽃이니 여기 이런 꽃이 자란다는 소문을 내지 않는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는데, 정작 소문은 그 교수가 다 내는 바람에 해마다 이 난리를 치르고 있다며 껄껄 웃으시는군요.


     

     사진 한 장 찍으면 안되겠느냐는 내 제의에 어르신께선 손사래를 치며 관리사쪽으로 발길을 돌리시네요. 어르신과의 짧은 대화를 뒤로 하고, 우리 일행도 내 개인적인 다음 스케줄 때문에 황망히 반구정을 빠져나왔습니다. 



올해는 남바람 보러 갔다가 갈매기 한 마리 가슴에 품고 왔지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