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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화

2017.05.01. - 핑크빛 설앵초의 치명적 유혹



     메이데이(5월 1일 노동절 휴무)는 설앵초를 만나러 가는 날입니다. 재작년부터 그렇게 자연스럽게 정해졌고, 아마 별다른 이변이 없는 한 계속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이번 탐화행은 오랜만에 두 K님 모두 참가하시어 3인방 완전체(?)로 구성되었군요. 각자 집에서 출발하여 언양에서 합류, 영축산으로 향했습니다.



PC에서는 사진 클릭하면 약간 커집니다.





     설앵초와는 무슨 악연인지, 작년/재작년 두 번 연속으로 위험천만한 금강폭포 루트에 도전했다가 개고생은 기본이요, 천단만애의 벼랑길을 밧줄에 의지해 기어오르며 큰 위태로움을 맛본 바 있어 이번엔 좀 더 편안하고 거리가 짧은 코스를 물색하였습니다. 그래서 택한 것은 통도사를 경유, 비로암에서 영축산 정상부로 바로 이어지는, 가파르지만 접근 경로가 가장 짧은 길입니다. 산행 시간을 최소화하여 꽃과 노니는 시간을 최대화한다는 전략이었지요. 그런데 이 전략이 우리에게 뜻하지 않았던 시련을 안겨 주게 될 줄이야!


    통도사 일주문을 통과하여 부처님 오신날 축제 준비로 한창 요란한 통도사 본찰을 우회, 곧장 비로암까지 진입하였습니다. 여기가 아마도 승용차로 올라올 수 있는 최대 높이일 것입니다. 주차 후 스틱과 신발끈만 조이고는 바로 출발합니다. 비로암 왼쪽 뒤로 등로가 선명하게 나 있어 별 다른 어려움 없이 거의 한 시간 가량을 잘 진행하였고 나는 맨 후미에서 따라갑니다. 그런데 어느새인가부터 바윗길 급경사가 시작되고 등로에 사람의 흔적이 희미해지면서 루트가 애매해집니다. 아예 발자국이 끊긴 장소를 만나면 주위를 두루 살펴 나뭇가지에 매달린 표지기(산행 리본)을 찾아 그 방향으로 계속 진행하는 방식으로 산행을 겨우 이어나갑니다.


     정상부로 접근할 수록 경사가 심해지는데, 크고 작은 암석으로 덮힌 길이라 조금만 스텝을 잡못 디뎌도 발 아래의 돌이 와르르 무너져 내립니다. 선등자는 바위를 건드리지 않고 발을 디디려 극도의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함은 물론이고 후등자도 자칫 위에서 굴러 내려올지 모를 낙석에 대비해야 해서 간격을 크게 벌려 소심 모드로 진행해야 했지요. 어서 이 고약한 길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만 앞서는군요.


     하지만 "잘못될 가능성이 있는 일은 반드시 잘못된다"라는 머피의 법칙은 이번에도 결코 우리를 피해가지 않는군요. 잘 가다가 스틱으로 한 스텝쯤 위의 바위 하나를 잘못 찍는 바람에 호박통 크기의 돌덩이가 덜컹 뒤집어져 낙하하듯 굴렀고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내 오른발을 덮쳤습니다. 오른쪽 새끼발가락에 격렬한 통증을 느꼈지만 출혈은 발생하지 않은 것 같아 꾹 참고 계속 진행하였습니다. 내 발등 내가 찍은 꼴이니 일행에게 내색할 수도 없고 ... 그런데 이건 전주곡일 뿐이었지요. 


아부지 돌 내려가유~~~~~


     그렇게 진행하다가 잠시 쉬어가기로 합니다. 쉴 만한 넓은 공간이 없어 그냥 각자 걷던 자리에서 짐만 내려놓고 가져 온 쑥떡과 커피로 요기를 하였습니다. 문제는 선등자가 출발하기 위하여 몸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옆의 바위를 건드리는 순간 발생했습니다. 불안정하게 얹혀져 있었던 듯한 그 바위는 슬쩍 스치기만 했는데 힘없이 균형을 잃고 굴러내리기 시작합니다.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던 K부장과 더 아래에서 쉬고 있던 나는 화들짝 놀라 우선 몸을 피했는데, 약 600kg 정도의 무게로 추정되는 그 바위는 가속도가 붙기 전이라 회피할 시간이 있었지요. 우린 그러나 몸은 피했지만, 배낭을 대피시킬 여유는 없었습니다. 서너 번 구른 그 바윗덩어리는 K부장의 배낭을 치고 더 굴러 내려 와서 내 등산 스틱을 덮치더니 또 다른 돌덩이를 충격하고 그 돌덩이마저 무너뜨려 함께 저 아래로 시지프스의 바위처럼 굴러내리는군요. 자꾸 가속도가 붙으니 우당탕탕 바윗돌 구르는 엄청난 굉음이 한동안 산자락을 메아리칩니다. 창졸지간에 당한 일이라 "아부지 돌 내려가유~~~"라고 다급하게 외칠 여유도 실제론 없더군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피해 상황을 점검해 보았습니다. 


1. K부장의 배낭이 날카로운 바위 모서리에 찍혀 찢어졌습니다. 

2. K부장이 애지중지하던 소니 70-400mm 줌 렌즈(일명 은갈치렌즈)가 충격으로 맛이 갔습니다. 외관은 약간 긁힌 흔적밖에 없는데 속으로 골병이 들었는지 조리개 조절과 초점 링 조작이 전혀 되지 않습니다. 수동 조작도 안됩니다. 견적 좀 나오게 생겼군요. (이 글을 적고 있는 현재, 부품 교체 비용 32만원 견적을 받았다고 합니다) 

3. 내 왼쪽 등산스틱이 골절되었습니다. 맨 하단부가 완전 절단되어버렸네요. 미국 직구품이라 국내 A/S도 안되고...이제 버려야 하나?

4. 본건과는 무관하게 생긴 사고이긴 하지만 산행 내내 새끼발가락 통증에 시달렸습니다. (하산한지 너댓새가 지나도록 붓기와 통증이 가시지 않아 병원에 가 보니 새끼발가락에 미세 골절이 발생했다는군요. 열흘이 흐른 지금도 걷기가 불편합니다.)


     다행인 것은 인명피해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자칫 헬기 부를 뻔했군요. 이 일을 겪고 나니 걷는 것이 더욱 조심스러워집니다. 더 넓게 안전 간격을 유지하며 조심조심 진행해 나갑니다.



    벼랑 틈에서 야생 금낭화가 꽃을 피웠습니다. 모두들 롤링스톤 사건으로 망연한 심중인데도 금낭화를 만나니 좀 위안이 되는 모양입니다.



     그 와중에 귀한 백작약도 만납니다. 아직 단단한 봉오리만 달고 있군요. 활짝 핀 상태였다면 우린 금세 멘붕에서 벗어났을텐데요. 



     가까스로 능선에 도착하였습니다. 여기가 영축 정상부 바로 아래여야 하거늘, 정작 정상 표지석은 신불산 방향으로 저 멀리 보이는군요. 올라오면서 길을 잃고 헤매느라 정상에서 남쪽으로 한참 동떨어진 능선으로 올라와버린겁니다. 그래도 고생이 끝났다는데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부러진 내 스틱 ... 



     그간의 고생에 보답이라도 하듯 싱싱한 설앵초 한 무더기가 우리를 반깁니다.



     핑크빛 설앵초의 유혹은 자못 치명적입니다. 이 요망한 아이들의 홀림에 3년이나 연속 목숨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강행군을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이 가녀리고 고운 때깔의 자태를 보고 있을라치면 그간의 고생이 눈 녹듯 사라집니다.
























     그렇게 오후 한나절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완상합니다.



     고개를 들어 보면 영축산 정상이 보이고, 신록과 함께 활짝 피기 시작한 진달래가 영산(靈山)의 온 산자락을 울긋불긋 수놓고 있습니다.



     설앵초와 더불어 이 시기, 이 곳을 대표하는 아이들이 바로 숙은처녀치마입니다. 짧은 스커트에 보랏빛 머리를 풀어헤치고 봄 햇살을 가득 받고 있군요.



     진달래와 어우러진 모습이 너무도 예뻐서 이 곳에서만 사진을 수십 장 찍었던 것 같습니다.



     숙은처녀치마의 저 찬란한 보랏빛을 뷰 파인더 너머로 가만히 바라보면서, 나는 문득 키츠의 시 한 구절을 떠올렸습니다.      


     아름다움은 영원한 기쁨!(A Thing of Beauty is a Joy Forever!)







    어느덧 하산해야 할 시각입니다. 우린 오전 올라오면서 겪었던 어처구니 없는 짓을 또 반복합니다. 최단 하산길을 택한답시고 정상석 바로 아래의 팻말도 없는 희미한 길로 진입하여 내려왔는데, 사람의 왕래가 끊긴 지 오래된 곳이어서 아까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험난하고 애매한 길을 힘들게 헤매어야 했지요. 결과적으로 정규 등로로 하산했을 경우보다 고생은 고생대로 더하고, 시간은 시간대로 더 걸리고 ... 하산 길에서 겪었던 고초와 신산(辛酸)도 예사 것이 아니었지만, 여기 적어 본들 무엇하겠습니까? 이번 산행은 정말 최악의 경우만을 엄선했던, 갖가지 버라이어티의 결정판이라 할 만합니다. 비로암에 도착할 무렵 이미 주위는 완전히 캄캄해진 이후여서 폰의 플래쉬 불빛에 의존해 주차 위치까지 걸어 내려와야했지요.


     

(Track Log : Courtesy of M兄)


     위 트랙 로그에서 왼쪽 파란색 선이 당초 기대했던 하산 루트인데, 오른쪽 빨간 선이 실제 우리가 걸었던 길입니다. 도중에 길이 없어져 방황하며 그야말로 산짐승처럼 네 발로 기다시피하며 좌충우돌, 먼 길을 돌아돌아 헤매었던 정황이 고스란히 트랙으로 기록되어 있군요. 다신 반복하고 싶지 않은 해프닝입니다. 지도자 잘못 만나 정말 개고생한 동행인들에게 죄송한 마음 전합니다.  [끝]


    p.s. : 엊그제 동대산 은방울꽃 서식지에서 우연히 만난 나물공주님께서 설앵초 서식지로 접근하는 가장 쉬운 루트 정보를 주셨습니다. 내년에는 나물공주님 루트로 정말 안전하고 편안하게 모실것을 약속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