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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화

2017.05.14. - 느리게 찍는 사진의 즐거움 : 빈티지 렌즈와 놀다



     "빈티지는 추억이다."


     빈티지 렌즈를 하나 장만하였다. 옛 동독의 광학회사였던 마이어 옵틱 괴를리츠(Meyer-Optik Görlitz)사의 트리오플란(Trioplan)시리즈 중 50mm f/2.9 수동 렌즈다. 내겐 일전에 구입하였던 100mm f/2.8에 이어서 두 번째 보유하는 트리오플란 렌즈가 된다. 50밀리 화각을 커버하는, 최첨단 기술이 적용된 렌즈가 내게 이미 몇 개나 있는데, 왜 또 이 고물 렌즈를 또 구입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렌즈가 주는 추억 즉 빈티지 감성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Meyer-Optik Görlitz Trioplan 1:2,9 / 50 V


     트리오플란 1:2,9 / 50 렌즈는 1961년에서 1963년까지 생산되었다. 발매 당시부터 이 렌즈가 주는 톡특한 빛망울 효과로 꽤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나름대로 잘 나가던 마이어-옵틱社는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하필 소련 점령 지역에 위치했던 탓에,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광학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식 경영 관리상의 비효율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타사에 합병된다. 그 바람에 안타깝게도 괴를리츠 렌즈의 맥도 끊어지고 말았다. (2015년도 부활 프로젝트가 진행되어 잊혀질 뻔하던 이 '전설적'인 렌즈는 세상에 다시 빛을 보게 되었는데, 이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어쨌거나,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 몰라도 오래 전 동독의 장인이 만든 저 작은 트리오플란 하나가 내 품으로 들어왔다. 손바닥에 쏙 들어올 정도로 매우 작은 렌즈다. 내가 가진 가장 작은 렌즈인 니콘 50mm 1.8D와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보았다. 그 작은 니콘 렌즈도  트리오플란  2.9 / 50에 비하면 거인이다. 알루미늄 재질의 몸체는 어찌나 만듦새가 좋은지 꼭 대리석 조각 공예품을 보고 있는 듯하다. 조리개 스탑도 딱딱 잘 끊어지고 초점 링의 회전도 부드러운 것이 요새 젊은 렌즈 못지 않다.  


     트리오플란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단 3 장의 내부 렌즈로만 구성된 지극히 단순한 구조로 되어있다. 위 사진 왼쪽의 니콘 렌즈는 이보다 2배인 5군 6매의 렌즈로 구성되었다.



어느 사찰 화단의 화분에 짤박하게 고인 물에서 반사되는 빛을 의도적으로 초점을 흐려 찍어보았다. 동글동글 보석같은 저 보케를 보라!


     트리오플란 렌즈를 트리오플란 렌즈답게 해 주는 아이덴티티는 바로 저 독특한 빛망울(보케 - Bokhe)이다. 강한 점상 광원 방향으로 초점을 살짝 흐려 주면 비누방울 모양의 아름다운 빛망울이 만들어지는데, 외국에서는 이를 "비누 방울 보케(soap bubble bokhe)"라고 하여 매니아층이 형성되어 있을 정도다. 


     이 렌즈를 받아들고 바로 동대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은방울꽃이 한창인 내 아지트에서 이 렌즈가 주는 감성에 한나절 푹 젖어보기로 했다.



     당시 렌즈 코팅 기술이 좋지 못했기에 밝은 물체를 역광 상태에서 최대개방으로 찍으면 안개처럼 뿌옇게 흐려지는 현상(글로우Glow 현상)이 생긴다. 위 사진의 은방울꽃 봉오리 부분을 주목해 보라. 이는 분명 이 올드 렌즈의 한계이자 결점이지만 주제를 부드럽게 표현해 주는 효과가 있는 착한 부작용(?)이어서 이 렌즈의 팬들은 이것을 결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강한 역광 점상 광원일 경우엔 동글동글하면서도 윤곽이 뚜렷한 배경 빛망울이 생기지만, 위 사진의 상황은 잎새들 틈으로부터 스며 들어오는 면상 광원이어서 경계선이 부드러운, 꿈처럼 몽글몽글한 보케가 생긴다. 



     최대개방으로 찍어도 글로우 상황만 피하면 골동품 렌즈 치고는 제법 놀라운 선예도를 보여준다. 위 사진의 꽃봉오리와 잎에서 까실까실한 디테일이 느껴질 것이다. 60년이 다 되어가는 노장 렌즈로 찍은 사진인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역시 훌륭한 선예도를 보인다



     수동 렌즈여서 초점조절에 극히 신경을 써야한다. 다행히 요즘 카메라의 라이브 뷰 기능을 이용하여 실제 찍힐 피사체의 모습을 확대해 확인해 보면서 촬영할 수 있기 때문에 초점 조절에 성공할 확률이 꽤 높아졌다.



     모델 섭외하고, 얼짱 각도 찾아 내고, 카메라 위치 설정하고, 후면 LCD 디스플레이를 보면서 초점 맞추고, 노출 결정하고, 셔터를 누르고, 촬영 결과물 확인하는 일련의 "프리샷 루틴" 중 어느 하나도 소흘히 할 수 없다. 모든 과정이 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글로우(Glow)를 살린 예



글로우를 피한 예



     구도 맞추고, 초점조절 링 살며시 돌리다 보면 흐릿했던 꽃의 윤곽이 점점 또렷해지면서 어느 순간 초점이 맞아 선명한 꽃이 LCD 디스플레이에 딱 떠오를 때의 기쁨이란! 순식간에 정확한 초점을 잡아내는 첨단 AF 검출 기능으로 무장한 최신 카메라에서는 맛볼 수 없는 느림의 즐거움이 여기에 있다.



     빈티지는 추억이다. 잊혀지고 있거나 장차 잊혀질 어떤 것들에 대한 갈망을 추억이라 한다면, 빈티지란 그런 우리 갈망의 실체적 현현(顯現)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게 현현한 트리오플란과 함께 만들어 갈, 느리게 찍는 사진의 즐거움을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