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고생문이 활짝 열릴텐데, 잘 할 수 있겠니?"
통로 건너편 맨 앞좌석에 아빠와 함께 앉아 출발을 기다리고 있던 서윤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서윤은 대답 대신 아빠 얼굴을 한 번 쓰윽 보고는 미소를 가볍게 지어 보였다. 양쪽 볼에 살짝 비치는 보조개가 언제 봐도 귀엽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당찬 눈빛에서 해 내겠다는 결의가 엿보인다.
새벽 6시 30분, 한계령 경유 속초행 직행버스는 버스는 거의 등산객들인 승객을 태우고 동서울 터미널을 빠져나왔다. 인제, 원통을 거쳐 한계령에 도착하니 8시 50분 정도. 한계령은 5미터 앞이 보이지 않는 자욱한 운무로 뒤덮혀 있고, 짙은 는개비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적셔버리겠다는듯 어지러이 흩날리고 있었다. 어차피 일기예보를 통해 예상했던 바여서 낭패감 같은건 들지 않았다.
휴게소로 들어 가 본격 산행을 위한 채비를 시작한다. 일부 짐을 재분배하고, 등산 지팡이를 키에 맞춰 단단히 체결하고, 배낭을 다시 정리하여 둘러메고 멜빵 끈을 조절한 다음 그 위엔 우비를 꺼내 입고 단추를 다시 여미었다.
입산 통제 초소를 지난 시각이 9시 15분. 초소를 지키고 있던 레인저가 내 일행에 어린 청소년이 있음을 보고는, 오늘 예약은 해 두었느냐고 걱정어린 눈길로 묻는다. 중청대피소에 예약이 돼 있다고 하니 마음을 놓은 듯 안전 산행 하라며 손을 흔들어 준다.
원래 오늘의 산행은 야생화 탐방을 위해 나 홀로 떠나는 것으로 내 연간 스케줄에 잡혀 있던 것인데, 지난 5월 가족 모임에서 우연히 산행 이야기가 나왔고, 언제든 기회 있을 때 동생도 딸을 데리고 함께 산행할 기회를 가지는 것으로 의기 투합하였다. 그게 이번 산행으로 실현된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초등학생을, 그것도 어린 여자 아이를, 성인도 버거워하는 험로로 산행을 시켜도 될 것인지 고민하면서 동생에게 몇 차례 숙고해 볼 것을 권하였고, 동생도 딸과 협의(혹은 회유?) 결과 망설임 없이 동참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던 거다. 이미 동생 가족은 작년 성삼재 - 노고단 - 반야봉 - 삼도봉 - 뱀사골로 이어지는 제법 긴 당일 코스를 무난히 주파한 바 있다고 하니 나도 저으기 안심이 되었다.
비산하는 빗방울 알갱이를 온 몸으로 받으며 서북릉을 향해 걸음을 성큼성큼 내디딘다.
물 함뿍 머금은 숲은 그 푸르른 신록이 펄펄 살아 날아다니는 것같아 절로 기분이 좋아지고 힘이 샘솟는다.
초입부터 함박꽃이 우릴 반기고 있다. 몇몇 꽃은 벌써 시들기 시작하는걸로 봐서 지난주 정도가 한창이었던 것같다.
빗속에서도 함박꽃 향이 코 끝에 옅게 스친다.
계단 옆의 개다래도 꽃을 피우고 있다.
약 30분 진행하는 동안에 는개비가 점점 약해져 안개비로 바뀌고, 우의를 벗어도 몸이 젖지 않게 되었다.
땀 배출을 방해하던 우의를 벗어던지니 몸이 한결 더 상쾌해진다.
길섶엔 금마타리가 봉오리를 내밀고 곧 망울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다.
다음 주 정도면 활짝 핀 금마타리를 볼 수 있을 듯하다.
박새 빽빽하게 핀 평탄한 숲길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박새는 숲 속 생태계의 바로미터다. 박새가 무성하다면 그만큼 숲의 생태계가 건강하다는 증거다.
박새 사이로 눈개승마가 한창 피고있다.
비에 젖어 미끄러운 내리막길을 조심조심 내려가다.
하산이 아닌 등산길에서 내리막을 만나는 것은 그리 유쾌하진 않다. 내려간 만큼 나중 올라와야 하므로.
해맑게 피어 빗물에 곱게 세수한 함박꽃 생얼을 담아본다.
산사태 난 지역을 통과하고 몇 차례 가파른 계단길을 넘어서니 드디어 서북릉 갈림길에 도착하였다.
새벽 일찍 출발하느라 부실했던 아침 식사를 여기서 보충하기로 했다.
전날 밤 코스트코의 스낵 코너에서 사 온 불고기 베이크가 꿀맛이다.
후식이 빠져선 말이 안된다. 동생과 난 커피 한 잔, 서윤이는 과일주스.
아무리 커피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이런 곳에서 저 시에라컵으로 달콤한 스윗 아메리카노 한 잔만 마신다면
즉시 커피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한계령 삼거리 이정표에서 인증샷 남기고 또 출발이다. 대청봉을 향하여.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귀때기청봉, 반대쪽이 대청봉으로 가는 길. 우린 당연 오른쪽 길을 택한다.
장미와 사촌지간쯤 되는 붉은인가목이 비를 머금고 활짝 피었다.
단풍나무의 일종인 부게나무도 한창 꽃을 피워 내어 꼿꼿이 달고 있다.
붉은인가목의 씨방과 꽃받침을 담아 보았다. 생열귀나무와 확실한 구분을 하기 위해서다.
씨방이 길쭉하고 꽃받침이 꽃의 직경보다 크면 인가목, 꽃받침이 짧은 타원 혹은 원형에 가깝고 꽃받침이 꽃보다 짧으면 생열귀.
하기사 생열귀는 이런 고산엔 거의 서식하지 않는다고 하니 저런 동정 포인트를 확인하지 않더라도 생열귀임은 분명하다.
눈개승마 군락이 숲을 한껏 빛내고 있다.
산조팝나무일까, 설악조팝일까?
"설악아구장나무"로 불리기도 하던 설악조팝나무로 보고싶다.
서윤에게 꽃 이야기와 이런 저런 대화를 하며 쉬엄쉬엄 오다 보니 강아지바위에 도달하였다.
강아지바위 옆 풀섶엔 세잎종덩굴이 화사한 때깔을 자랑하고 있다.
눈개승마 핀 등로
추파춥스 하나씩을 물고 발걸음도 가볍게~
힘든 바윗길은 아빠가 뒤에서 밀어 주고
아빠와 함께라면 안개 자욱한 산중도 두렵지 않다.
아직 지지 않고 있는 큰앵초.
무얼까?
바위틈에 살고있는 금마타리 삼형제
애걔걔, 이제 겨우 3.3km밖에 못왔다니~~~
잠시 안개가 걷힌 순간 저 멀리 용아장성과 공룡능이 언뜻 드러났다가 사라진다.
이 순간을 놓칠세라 후딱 한 컷 찍었다.
잔도(棧道)도 지나고
산앵도 핀 숲길을 통과하니 참기생꽃이 우릴 반긴다!
기대했던 참기생꽃!
왜 저 아름다운 꽃에 "기생"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였는지...
비에 흠씬 젖는 바람에 그 아름답던 용태가 안쓰럽게 변해버렸네.
명월이를 기대하고 왔는데 월매만이 날 반기는구나.
참기생꽃 핀 능선에서 잠쉬 쉬어가다.
참기생꽃과 함께 놀고 있던 나도옥잠
여기에서도 금마타리는 꽃 피울 준비를 끝내고 때를 기다리고 있다.
풀솜대
검댕을 가득 뭍힌듯 언제 봐도 특이한 녀석, 검은종덩굴
등산화 끈을 통해 전해지는 딸바보, 아빠의 마음 ~
검은종덩굴
붉은병꽃나무의 때깔이 매우 진하다.
흔히 볼 수 없는 꽃쥐손이도 만났다.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중청대피소가 이제 1.6km밖에 남지 않았다.
활짝 핀 세잎종덩굴이 우릴 반긴다.
오늘 마지막 고비인 끝청에 도착하였다.
준비한 빵을 꺼내 간단한 새참으로 삼았다.
내색은 하지 않고 있지만, 서윤이의 얼굴에서 숨길 수 없는 고단함이 엿보인다.
겁없는 다람쥐 한 마리가 불쑥 나타나 함께 묵고 살자고 시위하고 있다.
등산 스틱부터 바꿔라, 쫌~~~~
누군가에게 얻었다는 등산 스틱, 정체모를 듕귁산, "마데 인 치나"다.
마디를 아무리 타이트하게 체결해도 보행 도중 어느 순간 쑥 들어가 버리거나 길이가 야금야금 짧아진다.
저 스틱을 믿고 체중을 실었다간 낭패 당하기 십상이다.
마지막으로 길이를 다시 맞추고 출발을 준비한다.
이 일대에 지천으로 자라는 마가목은 거의 꽃이 다 졌는데, 등로변에 늦둥이가 몇 있어서 담아 보았다.
등대시호의 어린 싹에 빗물이 고였다.
아주 높은 곳에서만 산다는 만주송이풀.
곧 만주송이풀도 군락으로 어우러질 듯하다.
아주 어렵지는 않게 중청대피소에 도착하였다.
예약된 대로 인원을 확인하고 일찌감치 자리를 배정받았다.
대청봉엔 일출맞이 겸 내일 새벽에 오르려 했는데, 기상 상황상 내일 일출은 물건너 간 것같아 오늘 오르기로 하고,
대피소 침상에 짐을 벗어 챙겨놓은 후 스틱과 물통만을 들고 대청봉으로 나서다.
대청봉 가는 길. 父女간의 훈훈한 대화. 안개 속에서도 서윤이 표정이 밝다.
바람꽃은 이제 겨우 조그만 봉오리를 달고 있다. 개화까진 2~3주는 더 걸릴 듯하다.
무거운 배낭만 벗으면 몸이 절로 훨훨 날아갈 줄 알았는데, 대청봉으로 향하는 600미터 오르막길은 빈 몸도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해발 1708미터 대청봉 인증샷!
짙은 안개로 주변 경치 조망이 불가능한 것이 조금은 아쉬웠다.
옆 사람에게 부탁하여 셋이 함께하는 완전체 사진도 찍다.
대청봉을 뒤로하고 눈잣나무 핀 탐방로를 다시 내려오다.
아직 덜 진 털진달래가 바람에 파들거린다.
진짜 도착. 이제 밥 먹고 쉴 일만 남았다.
저녁 일곱시가 넘으니 대피소 리셉션은 가차없이 문을 닫아버리고 더 이상의 산객들을 받지 않는다.
이후 도착한 산객들은 예약이 있어도 모두 돌려보낸다.
자리가 남더라도 예약 없이 도착한 사람들에겐 자리를 일절 배정해 주지 않는것도 원칙이다.
매정해 보이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원칙을 깨고서 늦게 도착한 산객들을 다 받아들이는 측은지심을 발휘한다면
이 작은 대피소는 걷잡을 수 없는 산객들로 넘쳐날 것이다.
여기서 쫓겨난 사람들은 하산하거나 저 아래 봉정암 요사채에 내려가서 하루 유숙을 애걸(?)해야 한다.
정면에 보이는 매점에서 됫병 생수 두 통, 라면 두 개, LP 가스를 구입하였다.
취사도구와 저녁거리를 챙겨 취사장으로 향하는 도중.
와이파이 안테나와 스마트폰 충전 서비스 시설이 보인다.
와이파이 신호 강도가 충분하여 카톡이나 인터넷을 하는데 지장이 없았다.
서윤이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오늘 밤의 만찬 메뉴는 라면으로 정했다.
즉석 조리식품도 찬조 출연.
햇반을 데워 하나씩 들고
그 위에 라면과 즉석식품을 얹어 비벼먹는다.
집에서 먹는 일상의 저녁식사에 비하면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의 불쌍한 식단이지만, 여기서만큼은 남 부럽지 않는 만찬이다.
옆 테이블에선 삼겹살과 훈제 오리 굽는 지글지글 소리 요란하고 고소한 기름냄새 진동했지만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밥 먹고 침상으로 돌아와 방울토마토로 후식을 삼는다.
저 야시같은 서윤이는 그 새 탈의실에 들러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야무진 녀석 같으니라구!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제 할 일 척척 찾아서 스스로 하는 서윤이가 너무도 대견하고 기특하다.
아직 어린아이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정말로 다 컸나 보다.
밥 먹고나도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산책삼아 바깥에 나왔으나, 비바람이 세차게 불고 몹시 추워서 금세 실내로 들어와버렸다.
내일의 여정은 오늘과 비교가 안되게 힘든 길이다.
서윤이네에게도 내일 산행 루트와 쉬어 갈 포인트, 식사 계획 등 전체 스케줄을 이야기해 주고,
오늘은 단지 예행 연습이었을 뿐, 진짜 고생은 내일이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20시 30분에 강제 소등하기 때문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사방에서 탱크 굴러가는 듯한 코골이 소음 공해가 난무하였지만 금세 잠이 들다.
(제1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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