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새 겨울입니다. 겨울이 기다려지긴 아마도 지금껏 살아오면서 처음일 듯합니다. 유난히도 뜨거웠던 지난 여름의 힘겨운 기억 때문일까요, 아니면 꽃쟁이로서, 휴일만 되면 바람 불고 비 뿌려 제대로 가을 꽃 맞이를 하지 못했던, 가을같지 않았던 올 가을에 대한 얄미움 탓일까요? 혹 이미 시작된 심리적 빙하기가 어서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마음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내 가슴은 언젠가부터 시린 바람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저 먼 곳 설산 어디에선가 발원한 얼음장같은 찬 바람이 강물처럼 흘러흘러 예까지 흘러 와 살갗에 소름을 돋게 하고, 코 끝에 고드름 얼리고, 폐부 깊은 곳에 다다라서 내 모든 몸뚱이와 마침내 영혼까지 꽁꽁 얼어붙게 할 그 시린 바람 말입니다. 그 곳이 아마 삼태봉에서 토함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찬바람 불면 그 길을 밟아야겠다고 생각해 두었고, 이제 겨울이 된 것입니다.
2016. 12. 03.
삼태봉 - 토함산 시린 바람 종주를 드디어 실행에 옮기는 날입니다. 사실 이 산행은 지난 주 토요일 예정하였으나 당일 새벽부터 비 분분히 뿌려 오늘로 연기하였지요. 지난 밤 미리 꾸려 두었던 행장을 짊어지고 어둠이 아직 걷히지 않은 바깥으로 나오니 하늘엔 새벽별이 총총히 반짝이고 조금 쌀쌀한 공기가 목덜미의 노출된 곳으로 스멀스멀 스며들어 살짝 몸서리가 쳐지는군요. 과연 시린 바람은 맞이할 수 있을까요?
먼저 들른 곳은 동네 24시간 돼지국밥집인데 시간이 시간인지라 손님이 나 말고는 아무도 없군요. 한 그릇을 청하니 뚝배기에서 펄펄 끓는 국밥이 금세 나옵니다. 최근 이 집 국밥 맛이 점점 예전보다 못해지고 있어요. 내 입맛이 변한 탓일 수도 있겠지요. 그래도 나 같은 손님을 위하여 24시간 깨어있으면서 언제든지 따뜻한 음식을 차려내 주는 그 자체는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몸이 덜 깨어서인지 생각보다 밥이 잘 넘어가질 않아 다 먹질 못하고 삼분의 일쯤 남긴 상태에서 숟가락을 놓았습니다.
동천강 건너 신천까지 걸어가서 6시 반에 출발하는 마우나 오션 셔틀버스에 몸을 싣습니다. 이 셔틀버스의 승객은 대부분 마우나 콘도나 골프장의 직원들이지만, 나 같은 일반인들도 이용할 수 있습니다. 동대 기령(東大 旗嶺)을 기점으로 종주나 횡단 등 들머리와 날머리가 다른 산행을 할 때 이 셔틀버스의 존재는 고마움 그 이상입니다. 게다가 무료입니다.
일곱 시가 채 안된 시각에 마우나 오우션 콘도 본관에 도착합니다. 스마트폰 위치 정보를 켜 보니 오늘의 일출은 15분 후로군요. 본관 건물 뒷편 바다 조망이 트인 곳으로 올라가 어선들의 불빛이 별처럼 떠 있는, 여명 밝아오는 새벽 바다를 한 컷 담습니다. 바람이 거의 없어 시린 바람 맞이는 틀린 것 같습니다.
여기서 바로 삼태봉으로 향하는 등로로 진입할 수도 있지만, 그랬다가는 숲에 가려 곧 있을 일출 광경을 담기 어려울 것같아 일단 비포장 자동차 도로를 따라 걷기로 합니다. 약 1km 정도 진행하면 좌측으로 삼태봉으로 연결되는 등로가 또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 길 도중에 무슨 큰 공사가 있는지 새벽부터 대형 덤프트럭이 분주히 왕래하고 있고, 500미터도 채 못가 공사장 출입구가 나타납니다. 파헤쳐진 길이 엉망이라 이 길로는 산행이 어려울 듯하여 애초 계획대로 바로 삼태봉으로 가기로 작정하고 다시 콘도로 되돌아 나오는데 동해바다 너머로 일출이 시작되려 합니다.
마음이 급해집니다. 일출을 관찰 할 수 있을만한 시야 트인 장소 확보가 급선무였기 때문에 급한대로 덤불을 뚫고 골프 코스쪽으로 후다닥 내려 가 한 컷 담아봅니다. 아뿔싸, 타이밍이 조금 늦었군요. 오늘은 수평선에 헤이즈도 없어 일출 사진 찍기 좋은 조건인데...
순식간에 수면 위로 붉은 햇덩이가 떠오릅니다. 아깝도다, 잘 하면 오메가도 볼 수 있었는데. 다음엔 일출샷 담으러 다시 와야겠습니다.
이왕 골프 코스로 접근한 김에 붉은 아침 햇살 가득 내려앉은 페어웨이로 내려와 봅니다. 마우나 코스 3번 홀 세컨샷 지점쯤이로군요. 부지런한 관리인이 잔디 씨를 뿌리고 있습니다. 골프장 무단 침입으로 행여 한 소리 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선이 마주치자 손을 한 번 흔들어주고는 애써 웃는 표정으로 "안녕하세요?" 하고 한 마디 방어적 선공을 날렸습니다. 그러자 이 아가씨, 뜻밖의 침입자에게 흠칫 놀라며 "예... 아저씨, 그린쪽으로는 들어오시면 안돼요" 라고 응답하는군요. "걱정 마시오. 내 비록 10년 구력에도 아직 백돌이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골알못'이지만, 그 정도의 매너쯤은 모르는 사람이 아니란 말이오"라 화답하려는데, 벌써 저 처자는 카트를 끌고 저 멀리 떠나고 있군요. 어쨌든 쫓겨나지 않아 다행입니다. 사진 위 1/4지점에 전봇대가 보이는데, 저 곳이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비포장 도로입니다.
첫 티오프(Tee off)가 아직 시작되지 않은, 아무도 없이 고요한 새벽 페어웨이의 분위기가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습니다. 딱 이런 상태에서 뒷 팀의 압박 없이 혼자 골프를 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럴 수만 있다면 우리 집 골방에 짱박혀 오랫동안 먼지만 계속 뒤집어 쓰고 있는 골프 가방을 다시 꺼내 볼 용의가 있습니다. 하하~
어느덧 해는 동해바다 위로 둥실 떠 올라 온 누리에 무한 찬란한 금빛 햇살을 가득 채워주고 있습니다.
그냥 멋지다는 말 외엔 적절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군요. 이 참으로 황홀한 광경 아닙니까? 때마침 노랗게 마르기 시작한 잔디 위로 금색 햇살이 더해지니!
저 멀리 산하동 강동 마린시티도 새벽 잠에서 마악 깨어나고 있는 중입니다.
5번 홀까지 왔습니다. 여기서부터는 공사 중인 도로로 다시 올라가야 합니다. 골프 코스를 조금 벗어나니 낙엽 사이에 로스트볼이 간간히 눈에 띄는군요. 아마도 예전 이 곳에서 내가 날려보낸 공도 잘 찾아보면 몇 개는 나올텐데요.
청미래덩굴 무성한 가시덤불 숲을 어렵게 헤치고 또 다시 도로로 올라섭니다. 어쩌다 보니 능선길 아닌 골프 코스로 진행한 탓에 삼태봉은 밟아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버렸군요. 저 길을 휘적휘적 걷는데, 이른 아침 공기가 상쾌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찬바람은 커녕 포근한 햇살 받으며 걷노라니 이마와 등짝에 땀까지 삐질삐질 납니다. 이제 시린 바람의 기대는 걷어들였습니다. 또 기회가 오겠지요.
고개를 북동 방향으로 돌려보면 저 멀리 동해바다가 보이고, 월성 원전에서 생산된 전기를 나르는 고압 송전 선로가 거미줄처럼 뻗어 있습니다.
이번 산행은 홀로 떠난 길이지만 홀로가 아닙니다. 내 그림자가 함께 하니까요. 긴 그림자가 나보다 앞서 건들건들 걷는 것을 보니 李白의 "월하독작"에 나오는 "아무영능란(我舞影凌亂)" 이 문득 떠올라 그림자에게 춤출 것을 명해봅니다. 주위에 보는 이 하나 없으니 저런 실없는 짓도 가능하지요. "독작무상친(獨酌無相親)"은 "독행무상친(獨行無相親)"으로, "잠반월장영(暫伴月將影)"은 "잠반일장영(暫伴日將影)"으로 고치면 지금 상황과 대충 맞아떨어지지죠? 단, 독작할 술을 오늘은 준비하지 못했으니 흥이 반감됩니다마는.
한동안 그림자 놀이를 하며 걷고 있는데, 웬 SUV 한 대가 나를 앞지르더니 저 앞에서 끼익 섭니다. 운전자가 내려 내게 다가오더니 여긴 어떻게 들어왔으며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 다짜고짜 따져 묻는군요. 아마 이 공구 건설사의 관리자인듯 합니다. "보다시피 산행 중이고, 토함산 방면으로 간다"고 하니 신분증 제시를 요구합니다. 이 무슨 황당하고도 불쾌한 요구란 말입니까?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어 오릅니다. "당신이야말로 뭔데 내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건가? 당신의 요구에 응할 하등의 이유도, 필요도, 의사도 없으며 난 나의 길을 가겠노라"고 강경 대응합니다. 서로 언성이 높아지고 삿대질이 오갑니다. 그런데 내 손에 쥔 카메라로 대체 뭘 찍고 다니느냐고 다그치듯 묻는 그의 말에 퍼뜩 상황 파악이 됩니다.
그는 나를 공사장에서 시시콜콜 사소한 트집을 잡아 언론에 떠벌리는 지방 언론사 기자나 환경단체, 혹은 몰래 찍은 사진으로 협박하여 푼돈 뜯어먹고 사는 파파라치쯤으로 의심하고 있었던 겁니다. 정수리까지 치솟던 아드레날린을 가라앉히고 약간 냉정을 찾아 그를 안심시키기로 작전을 바꿉니다. 그냥 아랫마을 사는, 걷기 좋아하는 평범한 일반인이며,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 절대 아니니 걱정 붙들어 매라고요. 예까지 오면서 찍었던 사진을 리플레이하여 보여주니 결국 그도 의심을 거둡니다. 그런데 사진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혼자 그림자놀이하는 샷이 떡하니 나타날 땐 정말 창피하더군요.
공사장 규정 상 현장 안으로 일반인을 통행시킬 수는 없으니 자기 차로 콘도까지 도로 모셔다 주겠다는군요. 그럼 어차피 태워주는 김에 콘도가 아닌 내 목적지 방향으로 데려다 달라 했더니 흔쾌하게 받아들입니다. 그의 오프로드 차를 타고 이스트힐CC 근처의 공사 끝단까지 2.5km정도를 편히 이동하였습니다. 과연 공사장은 굴착기 각종 중장비가 끊임없이 오고가는 중이어서 위험한데다가 우회할 만한 길이 없어 도보 트레킹은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이럴 줄 미리 알았다면 당연 이리로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 직원들은 저런 파파라치류의 사람들에게 꽤 시달리는 통에 카메라를 든 외부인엔 유달리 민감하다는군요.
차로 이동하는 짧은 시간 동안 서로 마음이 완전 누그러져서 현 시대 상황과 서로 처한 직장 분위기까로지 대화 이어졌습니다. 차에서 내릴 땐 이 어려운 시기를 잘 이겨내자고 서로 격려해 주며 작별 인사를 나누는 훈훈한(?) 해피 엔딩이 연출되었지요.
공사장을 벗어나 소나무 빽빽한 언덕을 넘으니 저 아래 이스트힐CC 골프장이 보입니다. 또다시 덤불을 뚫고 직행하여 철조망을 타 넘으니 클럽하우스로 진입하는 도로 위에 올라 설 수 있었습니다. 여기선 좌측, 즉 클럽하우스 반대편으로 방향을 잡아 출입구로 나갑니다.
조금 걸어가면 골프장 진/출입구가 나옵니다.
골프장 입구를 나서면 왼편 외동(입실)에서 오른편 양남(석읍)으로 넘어가는 904번 지방도로를 만나는데, 이 루트를 타는 산객들이 여기서 토함산 방향 진입처를 찿지 못하고 헤매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저 앞에 보이는 산을 넘어야 능선길로 진입할 수 있을텐데, 사방을 둘러봐도 높다란 낙석 방지 펜스로 막혀 있어 도무지 어떻게 뚫고 나가야할지 감이 잡히질 않습니다. 위 사진에서 보듯 외동쪽이냐 양남쪽이냐 양자택일의 기로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것 참 난제로군요. 손바닥에 침이라도 뱉아 탁 튀겨보고 싶네요. 내 직관을 믿기로 하고 외동쪽으로 좌향좌 합니다.
옳거니! 펜스가 열린 곳이 나옵니다.
열린 펜스 사이의 나뭇가지에 붙어있는 산악회 리본이 보입니다. 살펴 보니 리본을 따라 우측 펜스 뒤편 가파른 언덕을 타고 희미한 오솔길이 나 있습니다. 고맙다, 감마로드! 일단 능선에 올라선 후부터는 산등성이를 따라 난 가느다란 길을 걷기만 하면 됩니다. 통행량이 적은 탓에 길이 뚜렷하지 않아 중도에 끊기는 구간도 많지만, 대체로 큰 산맥을 줄기삼아 정북 방향으로 진행하면 되겠습니다.
야생화는 이미 다 져버렸고, 간간히 만나는 철 없는 진달래 말고는 꽃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습니다. 아쉬운대로 계뇨등 열매와,
노박덩굴 열매를 담아봅니다.
이 길은 기맥ㆍ지맥길이라는군요. "기맥"이라는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ㅎㅎ
울창한 소나무 등으로 인하여 조망이 그리 좋지 못합니다. 장쾌한 삼태-토함 지맥 능선을 타며 좌우로 펼쳐진 풍광을 만끽하고자 했는데...
큰 굴곡 없이 이렇게 생긴 오솔길의 연속입니다.
시야가 가리지 않는 곳에 잠시 쉬며 감포 부근의 바다위에 반사된 빛을 담아봅니다.
월성 원전에서 나오는 345kV 초고압 전력선이 이 등성이를 넘어 중부 경남쪽으로 전력을 공급합니다.
그림자놀이 심심샷을 또 찍어봅니다.
다시 임도를 만납니다. 이 길을 계속 걸으면 조항산 정상 표지석이 있는 언덕을 거쳐 경주풍력발전소로 연결됩니다.
경주판 "바람의 언덕"이라고나 할까요? 광활한 구릉성 산자락에 우뚝 선 7기의 풍력발전기의 위용이 일대 장관을 연출합니다. 위 사진 우중간에 우뚝 솟은 봉우리가 토함산 정상이지요. 저 곳을 타고 넘어 계속 북쪽으로 하산하면 오늘의 산행 종점인 시부걸이 나옵니다.
풍력발전기가 있는 일출, 일몰의 풍경이 아름다와 사진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아침 저녁나절 많이 찾는다는군요.
풍력 터빈과 억새와 태양의 컬래버레이션을 연출해 보았지만 싸구려 렌즈라서 그런지 플레어와 할레이션이 작렬합니다.
발전소 인근 초지엔 도깨비가지가 왕성한 기세를 자랑하며 저마다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습니다. 정부는 이놈들을 환경유해식물로 지정하여 박멸 캠페인까지 진행하고 있지만 하도 번식력이 왕성하여 속수무책, 거의 손을 놓다시피 하고 있다는군요.
풍력발전소를 벗어나면 이 삼거리를 만나게 됩니다. 사진 위쪽으론 석굴암 주자장으로, 오른쪽으로는 토함산 자연휴양림 및 장항리 방면으로 연결되지요.
풍력발전소에서 석불사(석굴암) 매표소까지의 구간은 우회할 곳이 없어 꼼짝 없이 저 포장도로를 따라 꽤 먼 길을 걸어야합니다.
개쑥부쟁이의 열매입니다.
석굴암 가는 길
석굴암 입구에 도착합니다. 매표소를 보니 씁쓸한 기억이 나는군요. 즉슨, 지난 가을 경주 지진으로 인해 관광객의 발길이 뚝 끊겨 지역 경제가 어려워졌을 때, 경주 시에선 관광객을 다시 불러들이고자 10월 한 달 동안 경주 시내의 모든 명소에 입장료를 받지 않을것을 권고하였는데, 불국사와 석굴암은 끝내 이를 거부하고 입장료를 챙겼다고 합니다. 안 그래도 평소 엄청난 돈을 긁어들이는 두 곳인데, 고작 한 달 동안의 입장료 수입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지 못한다면, 이는 수도 도량이 아니라 굶주린 아귀들의 소굴이나 다를 바 없군요. 이 땅의 불가엔 이판(理判)은 모두 사라지고 사판(事判)만 남은 시대가 된 것일까요? 에잇 중놈들, 남의 재물을 탐하던 자가 죽어 가게 된다는 철상지옥(鐵床地獄)에나 떨어져버렸으면 좋겠습니다. (불경스럽게도 세 치 혀를 함부로 놀리는 내가 먼저 발설지옥(拔舌地獄)으로 떨어질 지도 모르겠습니다.)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을 외며 토함산 정상으로 연결되는 등로로 진입합니다. 약 1.4km 정도의 완만한 오르막인데 의외로 꽤 힘들군요. 지금껏 상당한 거리를 걸었고, 그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지쳐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도 쉽게 가시는 그 길을 도중 몇 번이나 쉬며 힘겹게 발걸음을 옮깁니다.
도중에 성화 채화단이 있는 것을 보니 과연 이 곳이 경주 아니 신라의 진산(鎭山)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 앞 바위엔 비천문상이 부조되어 있는데, 아마 성덕대왕 신종(에밀레종)의 몸체에 새겨진 비천문을 그대로 옮겨온 듯합니다. 제법 이끼가 끼어 꽤 고색창연해 보이지만 성화 채화 의식의 원조라고 할 것이 그리스의 올림포스 산이니 이 곳에 채화단이 만들어 진 것은 815 해방 이후겠죠? 아무리 길게 잡아도 60여년 정도인 것같군요.
저 언덕을 넘으면 토함산 정상이 바로 나타납니다.
토함산정에 도달하였습니다.
날씨 청명한데다 바람까지 없어서 수증기가 낮은 곳에 머물러 움직이지 않은 탓에 이런 멋진 산그리메가 형성됩니다.
아침에 만났던 일출 장면 이상으로 아름다운 광경 아닌가요?
시계(視界)가 탁 트여 저 멀리 구룡포 앞바다까지 훤히 보입니다.
산그리메를 두고 떠나기가 아까와서 한 컷 더 담고 시부걸 방향으로 다시 아쉬운 발길을 옮깁니다.
이정표엔 '시부걸'이 아닌 '시부거리'로 표기되어 있군요. 남은 거리 3.7km입니다.
토함산정에서부터 비로소 등로다운 등로가 펼쳐집니다. 잣나무 빽빽한 저 오솔길은 등산로라기보다 차라리 데이트코스에 더 가깝군요. 어두운 잣나무 숲길을 터벅터벅 걷는 맛도 참으로 각별합니다.
팥배나무 열매가 곳곳에 떨어져 있습니다.
낯익은 시부걸 마을에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 봄이면 노루귀, 변산바람꽃, 복수초 등등 갖가지 야생화를 만날 수 있는 곳이어서 자주 왔던 탓에 여기서부턴 참 익숙합니다. 산행 종점을 여기로 잡은 것도 지금껏 시부걸까지 왔다가 야생화만 만나고 되돌아 나가면서, 토함산까지의 행로는 어떤 것일까에 대한 목마름이 한 몫 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을 어귀의 은행나무 아래엔 다 말라서 거의 곶감이 돼 가는 은행 소쿠리가 즐비합니다. 은행은 이렇게 숙성시켜 얻는 것인가 봅니다.
앗! 경주로 가는 버스가 정류장을 눈 앞에서 스쳐 지나가버리눈군요. 내가 타야 할 차편인데 ... 망했습니다.
이 시골의 버스 정류장에도 어지러운 이 시대의 쓰디 쓴 편린이 들러붙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내 그림자와 단체샷을 찍어보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그만둡니다. 약 삼십여분 멍때리며 앉아 있으니 다음 버스가 도착하는군요. 경주 시내로 이동하여 전에 소개한 적이 있는 성동시장의 한식 뷔페에서 늦은 점심 겸 하산주 막걸리 한 통 마시고 귀갓길에 오릅니다.
우리 마을에 도착하니 저녁 놀이 한창입니다.
트랙 확인해 보니 도상거리 약 25km를 7시간 35분에 걸쳐 걸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도중 건설사 직원의 차를 얻어 탄 2.5km 정도의 거리를 제외하면 22.5km를 걸은 셈인데 하루 분량의 산행치고는 적지 않게 걸었군요.
트랙 데이터를 구글 어쓰의 3D 지형에 대입해 보니, 걸었던 행로가 좀 더 실감나게 느껴집니다.
시린 바람을 안고자 나섰던 행길에서 찬바람은 커녕 땀으로 목욕했으니 시린 바람은 천상 다음으로 연기해야겠습니다. 이 가볍지 않은 길을 걸었는데도 피곤한 곳 하나 없이 말짱한 내 몸에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합니다.
○ 루트에 대한 소감 :
1. 마우나 오우션에서 이스트힐까지의 구간은 공사가 끝나는 내년 말까지는 가지 않는게 좋겠습니다.
2. 이스트힐에서 석굴암까지의 구간은 숲으로 시야가 가려 조망이 거의 없고 단조로와 꽤 지루합니다. 게다가 긴긴 포장도로의 짜증은 뽀너스로 ... 정 가야겠다면 혼자 가길 권합니다. 아님 오랜 시간을 함게 있으면서 대화 한마디 없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은 친구가 있다면 그 친구와 함께 가는 것은 좋겠군요. 운동 성향이 다른 부부나 친구가 함께 갔다가는 필시 싸움이 날 것입니다.
3. 석굴암-시부걸까지의 구간은 계절을 막론하고 매우 운치있는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부, 친구, 연인 누구라도 함께 걸어도 좋겠습니다. 물론 혼자 걸어도 좋은 길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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