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추색에 조용히 젖어볼 만한 곳을 찾던 끝에
아직 세간에 많이 알려지지 않아 고요하고 한적하다는
경주 "왕의 길"을 걸어 보기로 하다.
2016. 11. 05.
오늘도 역시 대중교통편을 이용하다.
06:55 호계역 발 무궁화호를 타고 경주역 하차(07:20).
성동시장통 한식뷔페 골목의 한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든든하게 해결한 후
100번 시내버스를 타고(08:00)
보문단지와 덕동호, 시부걸을 지나
추원마을에 하차(08:40)하여 탐방을 시작하다.
하차하면 바로 보이는 추원마을 진입로
뒤돌아 본 길.
경주로 연결되는 신작로가 보인다.
마을 입구에는 "왕의 길"을 알리는 표지는 따로 없다.
처음 이 곳을 찾는 사람은 조금 헛갈릴 것이다.
산허리 방향으로 죽 벋어 있는 저 시멘트 포장길을
한동안 걸어야 한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왕의 길" 팻말이 처음 등장한다.
첫 농가다. 저 플라스틱 기와 위에 이엉만 얹으면
영락없는 60년대 초가집으로 변신할 것같다.
마당에는 연세가 매우 많아보이는 할머니께서
혼자 농작물을 손질하고 계셨다.
"왕의 길"은 최근 경주시가 올레길 컨셉으로 개발한
도보 탐방길이다.
추원마을에서 함월산을 넘고 용연폭포를 거쳐
기림사로 연결되는 약 5km 정도의
길지도 짧지도 않은 걷기 좋은 루트이다.
고은 시인의 의견에 공감한다.
제주의 올레길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각 지자체마다 저마다 경쟁적으로 도보 탐방로를 만드는 것이
유행아닌 유행이 된 지 오래되었다.
어울길, 둘레길 하는 식으로
테마 탐방로를 한 둘쯤은 갖추지 못한 지자체가
거의 없어 보이는데, 남들이 하니 나도 한다는 식의
보여주기 행정이라 아니할 순 없지만,
긍정적인 측면이 상당히 많음도 부정할 수 없을 것같다.
테마 탐방로엔 저마다 그럴 듯한 스토리가 필요한 바
이 곳 스토리 텔링의 주인공은
바로 신라 31대 신문왕이다.
도중에 황용약수터를 만났다.
왼쪽 길은 탐방로이고 오른쪽은 약수터 및 펜션 진입로다.
약수터의 존재는 사전에 몰랐는데, 과연 물맛은 어떨지?
맛을 보지 않고 지나쳐서야 말이 안될 것이다.
콘크리트 리저브 탱크에 꽂힌 호스에서
어린아이 오줌발같이 가느다란 물줄기가
죌죌죌 감질나게 흘러 나오고 있다.
바가지로 물 받아 한 모금 마셔 보니
전혀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물맛에 저으기 놀랐다.
입에 머금는 순간 떠올랐던 생각은
"어? 홍초 물이네?"
다시 한 번 차분히 음미해 보니
신맛, 떫은맛, 단맛을 교묘히 배합해 놓은 듯했고,
약수 특유의 쇠맛(철분)과 탄산기도 약하게 느껴진다.
전반적으로 신 맛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마치
오미자 추출액을 약하게 희석한 느낌의 상큼한 신맛이다.
자연 상태의 물에서 이런 맛이 난다니 신기하기까지 하다.
가져간 물통의 물을 쏟아버리고 약수를 한 통 가득 채워
다시 걸음을 옮긴다.
약수터 광장에 가을 햇살이 가득.
인자암을 지나면 자동차 한 대가 지나다닐 만한
시멘트 도로가 끝나고 드디어 "왕의 길"이 시작된다.
신문왕은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삼국 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30대 문무왕의 아들이다.
문무왕은 삼국통일에 이어 통일 신라의 전성기를 열었고
왕 자신도 자신의 치적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죽으면서까지도 장차 죽어 동해 바다의 호국대룡이 되어
나라를 수호하겠다는 유언을 남긴 것은 국사시간에
익해 배운바다.
고즈넉한 탐방로
문무왕은 유언에 따라 사후 화장되어여
동해 바다에 해중릉을 조성해 안치되었다고 전하는데,
그것이 감포의 대왕암일 것이라는 전설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를 이어 왕위에 오른 31대 신문왕은
부왕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해중릉과 가까운 곳에
지금은 두 탑과 터만 남은 감은사를 세웠다.
오솔길에 가을 빛 내려 앉다.
잎사귀에도 가을 빛 피어나다.
전설에 의하면 신문왕 2년,
해관이 동해안의 작은 섬이 감은사로 접근한다고 보고하자,
이를 괴이히 여겨 점을 쳐 보았는데,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과 하늘의 신이 된 김유신이
새 왕에게 보배를 보내 주려 하니
이견대(利見臺)나로 나와서 수령하라 하였다고 한다.
이에, 이견대에 나가 보니 과연
며칠간 계속 된 풍파 끝에 대나무가 하나 떠올랐고,
이 때 등장한 용이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나라의 온갖 근심 걱정이 사라지는 신묘한 기적을
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알려준다.
신문왕은 이 대나무를 가져 와
용의 코치대로 피리를 만드는데
나라의 만 가지 근심을 없애주는 피리,
즉 "만파식적(萬破息笛)"이라 이름한다.
경주 시에서는 이 길을
후에 만파식적이 된 대나무를 받으러
신문왕이 친히 행차했던 길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이 컨셉으로 탐방로를 조성하여 "왕의 길"이라 명명했다.
그래서 "신문왕 호국행차길"이라 부제도 달고 있다.
제법 그럴듯한 스토리텔링 꺼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저 위 사진의 이정표에
"수렛재"와 "모차골"이란 지명이 보이는데
"수렛재"는 신문왕이 탄 수레가 넘던 고개라는 의미고
"모차골"은 신문왕의 마차가 지나던 골짜기란
뜻이라고 한다.
스토리의 근거를 뒷받침하는 적절한 재료이기도 하다.
신문왕이 잠시 쉬었을 법한 계곡에 앉아
맥주 한 잔을 마시기로 하다.
신문왕은 저 맥주 맛을 모르겠지.
귤 맛도 몰랐을 것이다. 험.
전 여정에 걸쳐 표고 차가 크지 않아
산행이 아니라 산책로에 가까운
매우 유순한 길이어서 걷는데 부담이 없다.
혼자보다도
둘이서 대화하며 휘적휘적 걷기에 딱 적당한 루트다.
용연폭포에 도달하였다. 위에서 본 모습.
굽이길을 돌아 아래로 내려 가 보니
큼직한 돌문 사이로 폭포가 보인다.
생각보다 큰 폭포의 규모에 놀랐다.
광각렌즈로 찍어서 사진으로는 실감이 그리 나지 않는데
낙차도 제법 크고 수량도 풍부한,
빼어난 경관의 폭포였다.
이번 탐방 최대의 수확일 수도 있겠다.
"의시은하낙구천"
구천에서 떨어지는 은하에 무지개까지 걸렸다!
셀카도 찍어보다.
어느 새 기림사에 도착.
도자기로 구운 삼천불을 모신 삼천불전만 휙 둘러보고
총총 경내를 빠져나왔다.
일주문을 벗어나면 오늘의 탐방이 끝난다.
경주로 복귀하는 차편이 영 마땅찮다.
골굴사 입구 삼거리에서 경주행 100, 150번을 타야 하는데
여기서 삼거리까진 도보로 1시간이 넘게 걸린다.
하루에 세 번 있는 벽지 순환버스(130번)를 이용하면 되는데
시간 맞추기가 결코 쉽지 않다.
130번 버스 시각을 맞추지 못하면, 한 시간 눈 딱 감고
지루한 아스팔트 포장길을 털레털레 걸어 나오거나
히치하이킹을 해야 한다.
나는 지나가는 농기계를 운 좋게 얻어 타고
골굴사 입구까지 나올 수 있었다.
골굴사 입구 삼거리의 한 식당에서
생선구이 정식으로 늦은 점심을 삼다.
("왕의 길" 탐방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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