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공항 출발시엔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함 그 자체였는데 비행 도중 점점 구름이 짙어지더니 이내 구름 속의 산책으로 바뀝니다. 착륙 무렵엔 시계 완전 제로, 트랩을 내리니 하늘이 잠깐 열리긴 합니다. 그러나 이내 닫히고 굵직한 함박눈이 펄펄 내리기 시작합니다.
혹시나 하는 실낱같은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다시 한 번 통제 상황을 확인해 보니 역시나입니다. 바로 플랜B를 꺼냅니다. 아마도 접근 가능한 숲은 그 곳일거라며 맨 먼저 들른 곳은 인근에 있는 한라수목원입니다. 도로는 더께로 쌓인 눈이 염화칼슘과 반응하여 온통 곤죽이 되어있고, 그 위를 체인을 장착한 자동차들이 우두두두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러다니고 있습니다. 시내버스를 잡아 타고 평소보다 갑절 이상의 시간을 걸려 팝콘같은 눈송이를 뚫고 한라수목원에 도착합니다. 이 와중에 대중교통 시스템이 작동해 주는게 고맙기만 하군요.
애기동백꽃이 눈을 뒤집어 쓰고 얼어 있는 모습이 참으로 처연하면서도 뭉클한 심사를 일으키는군요.
이게 먼나무요?
먼나무요.
먼나무냐고요?
먼나무라고욧!
제주에 가로수로 가장 흔히 눈에 띄는 먼나무입니다. 이 계절에도 낙엽이 지지 않는걸 보면 상록수인가 봅니다. 빨간 열매가 눈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멀구슬나무의 열매입니다. 자세히 보면 쪼글쪼글 거의 곶감이 되어 있습니다. 빨간색이었다면 눈과 더 예쁘게 어울렸겠죠?
멀구슬나무 열매를 멀리서 잡아봅니다.
수목원 내부도 폭설로 인한 통제구간이 많아 설렁설렁 입구 근처만 둘러보고 금세 돌아 나옵니다. 이미 점심 시간이어서 식당으로 직행하기로 하고 정류소로 나와 버스를 기다리는 사이 잠깐 구름이 걷혀 한라산 자락을 살짝 보여주는군요.
먹방투어의 첫 타겟은 보성시장의 순댓국밥입니다. 일행 중에 제주를 처가로 둔 분이 계서서 이런 숨은 맛집 탐방이 가능했습니다. 시장통 한 구역에 순대를 파는 식당이 집결해 있더군요. 그 중 우리는 "감초식당"을 택했습니다. 만화가 허영만의 "식객"의 모델이 된 집이라는군요. 그래서인지 벽 사방에는 온통 만화로 도배되어 있습니다. 이런게 진짜 "도배"입니다.
반대편 테이블에는 가끔 TV에 보이는 낯 익은 사람 2인도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고 있네요.
이놈의 고약한 날씨 땜에 한라산을 눈에 담아 가진 못할지언정 배에는 담아가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한라산을 주문합니다. 메인 메뉴가 나오기 전 우린 한라산부터 입 속으로 부어 넣습니다.
모듬순대 Type-C의 비주얼입니다. 순대, 머릿고기, 내장, 막창의 환상적인 컬레버레이션이라고나 할까요? 다만 간은 보이지 않는군요. 간을 좋아하시는 분이 계셔서 종업원을 호출하여 간의 행방을 문의하니 원래 간은 포함이 되지 않는답니다. 아마도 제주 용왕님이 파견한 토끼가 제주 돼지의 간을 모조리 빼 간 탓일거라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가격은 19,000원! 가성비 짱입니다. 나는 평소 순대 외에 저런 부산물을 잘 먹진 않지만 잡내 많이 없고 쫄깃한 식감이 좋아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역시 한라산과 잘 어울리는 안주!
이어서 등장한 것은 감초순댓국밥(7천원)입니다. 감초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니고 식당 이름이 감초식당이어서 메뉴에 접두어로만 붙은 것입니다.
다대기를 섞기 위하여 국밥을 휘저어 본 순간 "이게 실화냐?"라는 외마디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거짓말 한 개도 안보태고 정말 뚝배기 바닥까지 고기가 꽉꽉 들어 차 있습니다. 순댓국밥, 돼지국밥 마니아인 내가 평생 먹어 본 돼지국밥류 중 단연 원탑급입니다. 부산 장전시장통 비봉신식당은 이제 꺼져버렷!
한라산을 절로 소환하게 되는 멋진 안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순댓국밥만으로도 한라산 몇 병 정도의 안주로 충분해 보입니다. 결국 우린 먼저 안주용으로 주문했던 모듬순대를 반도 못먹었군요. 남은 것은 포장해 달라해서 싸 들고 나왔죠. 우리 집 강아지 주련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포만감을 억누르고 밖에 나와 보니 여전히 폭설은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블록버스터 재난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지 않나요?
배가 부르니 이런 상황을 즐기는 여유까지 생깁니다.
제주 토박이들도 이런 징한 눈은 평생 처음 봤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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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남쪽나라 제주에서 이런 광경을 보는 것도 평생 보기 드문 행운(?)이겠지요? 다음 목적지를 두고 고민 끝에 함덕해수욕장을 가 보기로 합니다. 이 겨울에 해수욕장이라니, 무슨 생뚱맞은 여성 취향적 감성인지 모르겠으나 딱히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기에 모두를 묵묵히 따릅니다. 사실 수선화 피는 산방산이나 김영갑갤러리가 있는 두모악으로 가고 싶었지만 지금 교통상황으로선 어림도 없습니다.
시내버스로 약 1시간을 달린 끝에 함덕에 도착합니다. 거친 눈보라에 일단 우린 해변의 한 까페로 잠시 피신하여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몸을 녹이기로 하였습니다. 이 곳도 의외로 겨울 바다를 즐기려는 손님들로 꽉 차 입추의 여지가 없었는데, 어찌어찌하여 자리를 마련하고 엉덩이를 븥였지요.
주문 후 까페 밖 테라스로 나와 보니 함덕의 바다가 보입니다. 밖에 보이는 저 곳으로 가 보기로 합니다.
거센 바람에 포말이 일렁이는 바다 빛깔이 꽤 아름답습니다. 차갑고 을씨년스런 분위기가 양념이 되니 커피 맛도 배가 되고요. 오기 잘 했어요.
한동안 시간을 보낸 후 우리는 까페를 나와 다음 미션 수행을 위하여 시리고 거친 블리자드 속으로 다시 뛰어듭니다.
중고딩들이 수학여행으로만 가는 곳인 줄 알았던 삼성혈! 입구에 도착하여 입장권을 사려고 하자 이 곳 직원들이 폭설로 인하여 표를 팔 수가 없으니 돌아가라고 합니다. 원래는 6시까지인데 오늘은 5시에 닫을 예정이고 지금은 4시 30분이니 입장이 불가하다는겁니다. 황당해진 우리는 잠시라도 들여 보내 줄 것을 요구했고, 직원은 초지일관 완강히 거부하고 ... 승강이를 하고 있는데, 그 곳의 주임이라는 분이 와서 입장을 특별히 허가하겠다는군요.
특별한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눈 내린 삼성혈은 매우 고즈넉하고 운치있었습니다. 저기 보이는 원형으로 세워진 비석 써클 중간에 제주의 開祖가 된 고, 양, 부씨 세 성의 시조가 용출한 구멍이 있다는군요. 고, 양, 부씨로서는 이 곳이 성역이겠지요.
삼성혈 경내에 자라는 여름 감귤인데 슬쩍 하나 따서 맛을 보니 너무 쓰고 시어서 퉤퉤 ... 다른 분이 딴 것은 먹을만 했습니다. 역시 나는 뽑기 운이 없어요.
성역답게 유현한 분위기가 나는 것은 끊긴 인적과 쌓인 눈이 일조를 해서이겠지요.
먼나무는 어딜 가나 있습니다. 우린 직원의 재촉이 부담스러워 후딱 둘러보고는 총총히 경내를 빠져나옵니다. 입장료를 온전히 지불했는데도 쫓기다시피 나오니 괘씸한 생각도 듭니다마는 저 직원들에게 얼굴을 붉혀 봤자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저녁식사를 해결하러 간 곳은 인근의 동문시장. 삼성혈에서 걸어갈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
바다가 가까와서인지 어물전과 횟집이 즐비합니다.
횟집 골목엔 여러 가지 어종으로 미리 회를 떠 놓은 패키지를 판매하는데, 저것 한 팩이 만원.
제주답게 말린 옥돔이 눈에 흔히 뜨입니다.
갈아 만든 천혜향 주스도 보이고요. 뭍에서는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제주 명산물인 순대도 먹음직해 보였습니다.
반짝반짝 예쁘고 늘씬한 은갈치도 기본. 그런데 꽤 비쌉니다.
호객 행위를 뿌리치고 여기저기 들러 가격을 알아보며 흥정을 시도한 끝에 어딜 가나 다 같다!란 결론을 내리고는 한 식당을 택하여 회를 주문합니다. 방어, 광어, 밀치, 숙문어 등으로 구성된 4만 8천원짜리 모둠회인데, 제주 회가 저렴할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그리 싸진 않습니다. 주당 4명에겐 모자라는 양이어서 1만원짜리 패키지를 하나 더 추가하였습니다. 매운탕, 밥 등 상 차림비도 별도입니다.
한라산이 빠지면 많이 섭섭하죠!
쨍그랑~ 꿩 대신 닭이라고, 먹방 투어도 그런대로 괘안쿤요. 흑흑.
알딸딸한 취기를 안고 밖에 나와보니 여전히 도심 블리자드는 계속됩니다.
어린아이들처럼 천진해져서 이런 실없는 장난도 해 봅니다.
보오람찬(?) 하루를 끝마치고서 ... 이젠 숙소로 고고~
<<< 숙소에서까지 음주 및 야간 알바 활동은 늦도록 계속되었지만 기술은 생략합니다 ^^ >>>
이튿날, 숙취로 어지럽고 멍한 머리를 이고서 새벽 어둠을 헤치고 다시 먹방 대장정을 나섭니다.
우리의 대장님이 제주의 처가를 포함한 인맥을 총 동원해서 발굴한 회심의 맛집! 비록 외관은 허름했지만.
맛은 더 없이 럭셔리했던 갈치조림!
국물이 거의 없이 짜글하게 조린 저 갈치조림은 내가 아는 모든이들에게 권하고 싶어요. 아 그리고 사진에 살짝 보이는 씨래기된장국도 이 집의 시그니처라 아니할 수 없겠네요! 해장에 일품입니다. 가정식 백반 8,000, 김치찌개, 된장찌개, 동태찌개 각 8천원, 고등어조림 중 25,000 대 35,000, 갈치조림 중 35,000 대 45,000으로 결코 저렴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신 훌륭한 맛과 아낌 없는 물량 투입으로 적어도 손해봤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결국 ... 해장 한라산을 등판시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미션 컴플리티드!
멋진 식사 후 숙소로 되돌아가 조금 쉰 후 다음 미션 수행을 위하여 짐을 싸서 나섭니다. 이 개천 곁에 제주가 낳은 거상이자 우리나라의 역대 여걸 중 한 분인 김만덕 선생 기념관이 있었는데, 미처 사진으로 남기지 못했네요.
제주까지 와서 도심 먹방만 하고 가기가 못내 억울하여 우리가 오른 곳은 바로 사라오름 ... 이 아니라 사라봉 공원입니다.
시내버스에서 내려 터덜터덜 잠시만 걸으면 됩니다. 공원 오르는 길도 눈이 쌓이니 그런대로 분위기 좋아요!
파란 바다색이 곧 찾아 올 봄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정상에는 사라봉 공원 표지석이 있고 사진엔 보이지 않지만 그 옆엔 전망대를 겸한 팔각정이 서 있습니다.
제주공항 방향입니다. 활주로로 접근하는 비행기 한 대가 보이는군요.
한라산 방향입니다. 운무에 가려 보이진 않지만.
다시 내려와서 이번엔 동문시장을 거쳐 오일장을 가 보기로 했습니다. 도중에 만난 올레길 표지판.
길거리 배롱빡에 걸린 한 멋진 작품이 눈길을 끕니다.
시장 한 켠의 떡집에서 기념품으로 오메기떡을 구입합니다. 이 집이 언론에 자주 노출된, 지구 최강의 원조 오메기떡집이라는군요. 우리 식구들이 떡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지라 나는 구입하진 않았습니다.
대신 시식만 해 봅니다. 쫄깃한 식감이 괜찮게 느껴지는데, 배가 고팠다면 맛있었을 것 같습니다.
건입동 흑돼지 거리를 거쳐 한 때 제주 최고의 번화가였다가 지금은 신제주에 명성을 내 준 칠성통을 지나니 옛 제주 관아가 있던 관덕정이 나옵니다. 한 때 제주에 거주했던 이중섭의 작품을 모티브로 한 듯한 나무 소 한마리가 광장을 지키고 있군요. 여기에서 버스를 타고 오일장으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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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장은 여느 시장에 비해 이렇다 할 특별한 점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있다면 천혜향, 레드향 등 제주 특산 농산물이 풍부하다는 것 정도. 너무 문명화(?)되어 재래 시장의 운치가 떨어진다는 것도 조금 아쉬운 점이랄까요?
제주산이라니 한 번 담아봅니다.
호떡이 맛있어 보여 하나씩 사서 어린아이들처럼 물고 시장을 계속 돌아봅니다. 꿀을 질질 흘리면서요. 한 개 700원.
시장통 구석에 있는 허름한 식당을 우리 먹방의 대미로 삼기로 합니다
일행 중 한 분이 주문한 동태탕(6천원)입니다. 우리가 늘 먹던 동태탕의 맛과는 뭔가 다른 독특한 맛입니다. 주문하신 분은 불호라는군요. 맛을 보니 제겐 좋았네요. 하기사 저는 맛을 "좋다, 좋지 않다"라는 잣대보다는 "이건 이런 맛이요, 저건 저런 맛이로다" 로 받아들이려는 입장이라서 ...
K兄은 몸국(8천원)이라는 것을 주문했는데, "몸"은 제주에서 나는 해초류의 일종이랍니다. 몸과 돼지고기와 된장을 풀어 뚝배기에 푹 끓여 낸 국인데, 해장에 좋다는군요. 맛을 보니 처음 접하는 맛이어서 제겐 매우 신선했습니다. 사진처럼 이렇게 3000RPM 정도로 회전 믹스하면
이런 비주얼이 나옵니다. 나름 제주도통인 대장께서 맛을 보시더만, "이 맛이 아닌데..."라며 불만을 표시하는군요. 하하.
제가 주문한 것은 고기국수(5천원)입니다. 역시 된장을 살짝 푼 돼지 육수에 국수를 삶아 맛을 내고 거기에 수육을 투하한 제주도식 국수인데, 약간 돈코츠 라멘의 향기가 ... 어쨌든 처음 먹어보는 음식은 항상 기대감과 흥분이 교차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1박2일의 전 일정을 마치고 14:50분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행 버스에 오릅니다.
떠나는 시각까지 펄펄 눈발이 휘날립니다.
정시에 탑승하였으나 기체 얼음 제거 작업(디아이싱)을 하느라 약 1시간 출발이 지연되었습니다.
기체가 우측으로 선회하는 틈을 타서 한라산을 잡아봅니다. 하늘이 열려서 정상부를 포함한 그 일대가 드러났군요. 남벽도 보이고요. 지금 저기에는 거의 환상적인 광경이 펼쳐졌겠지요? 그래도 멀리서나마 눈 덮힌 백록담을 구경했으니, 이번 산행이 완전 실패는 아닌 셈입니다. 흑흑.
김해 공항에 도착하니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이 우릴 반기는군요. 지겹도록 보이고 밟히던 그 많던 눈을 눈 씻고도 찾아 볼 수 없으니 마치 꿈 같기도 하고, 잠깐 딴 나라에 갔다 온 기분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한라산 눈꽃산행을 한 마디로 보여주는 사진 한 장입니다. 그러나 먹방은 성공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외부 인사인 저를 따뜻하게 맞아 주시고 불편함이 없게 잘 배려해 주신 7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특히 초청해 주신 K兄과 모든 일정을 기획하시고 총무 및 자상한 여행 가이드역까지 담당하셔서 제주의 또 다른 멋과 맛을 알게 해 주신 대장님께도 각별한 감사를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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