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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

총체적 난국 - 이 일을 어찌 하오리까?

     지난 9월 24일, 정말 오랜만에 두 K님과 함께 연례행사인 물매화 맞이 차 근교 높은 산 나들이를 하였습니다. 예상했던 바와 같이 작황은 예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나 시기는 그런대로 맞아 기대 이상으로 많은 물매화를 만날 수 있었지요.

     그런데 첫 컷부터 사단이 납니다. 사진 찍은 후 카메라의 액정에 디스플레이 되는 사진이 죄다 이모양입니다.

 

 

 

     백 남준류의 비디오 아트나 앤디 워홀류의 팝아트 작품에서나 볼 수 있는, 추상도 아니고 구상도 아닌, 혹은 추상이기도 하고 구상이기도 한 아방가르드한(?) 사진이 떠억~~~!!!

     처음엔 요새 노안이 심해진 내 눈을 의심했으나 눈을 몇 번이나 닦고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장을 더 찍어봐도 정상으로 돌아올 기미가 없습니다. 혹 메모리나 배터리 전압 문제인가 하여 딴 메모리, 배터리로 갈아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사진 찍기를 포기하고 말았네요. 더우기 맨날 두 대씩 들고 오던 카메라를 오늘따라 달랑 저것 한 대만 가져온 탓에, 날 찍어주세요 하며 활짝 핀 모습으로 유혹하는 그 아리따운 물매화를 보고도 그저 손가락만 빨 수밖에 없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져버린 거지요.

     내 망연자실한 모습을 가엽게 여긴 포항의 K兄이 마침 번외로 챙겨오신 중형카메라(Mamiya 645AFD + Kodak Proback 645M)를 고맙게도 빌려 주시어 겨우 빈 손은 면했지만 ...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난 오늘, 드디어 문제의 Kodak DSC Pro 14N 카메라를 위해 방바닥에 간이 수술대를 설치하고 개복 수술에 들어갑니다.

 

 

 

     14n 등 코닥 바디는 놀랍도록 단순합니다. 코닥은 자체 DSLR 바디가 없기 때문에 니콘에서 필름카메라 몸체(F80)를 사 와서 자사의 이미지 센서, 내부 회로 및 소프트웨어를 우겨넣어 팔아 먹었던지라 급조한 티도 나고, 좌우간 상당히 허접한 느낌입니다. 심지어는 위 사진 우측에 보면 필름이 들어가는 공간도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이 허접한 바디에서 요새 최신 카메라도 따라 올 수 없는 코닥만의 특별한 이지미를 뽑아준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을 지경입니다.  

 

 

 

     사진이 죄다 앤디 워홀의 팝 아트 작품이 된 것은 필시 이미지 센서의 정보를 메인보드의 이미지 프로세싱 칩으로 전달하는 위의 저 플랫 케이블(필름 케이블?)의 접촉이 느슨해진 탓이라는 결론을 내렸었죠. 개복을 해 보니 과연 위의 플랫 케이블과 케이블 단자를 밀착시켜 주는 갈색 케이블 가드 조각이 원래의 자리에서 조금 이탈해 있습니다.

 

     옳거니 하며 일단 케이블을 분리하여 클리너로 금속 접촉면을 닦아 주고 다시 케이블 단자에 정위치 시킨 후 이탈한 케이블 가드로 고정을 시도하였는데 아무리 해도 안정되게 고정이 안되는군요. 내가 할 수 있는 오만가지 재주를 다 부려봐도 고정이 안되는 것을 보니 아마도 가드의 고정 돌기같은게 부러진 모양입니다.

     난감한 상황이지만 여기까지가 내 무딘 손의 한계인 것 같군요. 일단 작업을 중단하기로 하고 이왕 개복한 김에 이미지 센서를 분리하여 센서 클리닝(이물질 청소)을 하기로 했습니다.

 

 

 

     적출된 이미지 센서입니다. 옛 필름카메라의 필름에 해당하는, 디지털 카메라의 핵심 부품이죠. 클리닝은 위 센서에 달라붙은 먼지 등 이물질을 아주 주의깊게 닦아내는 작업을 말합니다. 이 작업을 어설프에 하면 오히려 센서가 더 오염되어 클리닝을 안하는 것만 못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죠.

 

 

 

     이미지 센서 보드를 탈거하면 바로 셔터박스가 노출되는데, 아앗~~! 셔터막(셔터 커튼)이 무언가 이상합니다!!

 

 

 

     금속 박막으로 이루어진 포컬 플레인 셔터 커튼의 일부가 찢겨 있는겁니다. 아,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또 한 번 멘붕입니다. 겨우 이제 2만컷 넘긴 셔터의 내구성이 이 모양이라니...

     기계적 신뢰도 하면 니콘인데, 니콘의 그 대단한 기술력에 배신감마저 드는군요. 저건 셔터박스를 통째로 교환하는 수 밖엔 해결책이 없을 것 같습니다. 워낙 오래된 기계라 아직 부품을 구할 수 있을런지 확신할 수도 없고요.

     케이블 고장(어쩌면 센서나 메인보드 고장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음)에 셔터 커튼까지 찢어지다니... 총체적 난국이 아닐 수 없네요.

     14n만이 뽑아주는 사진의 톡특함은 어떤 카메라도 흉내낼 수 없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매력이 있기에 이대로 포기하기엔 무도 아쉬움이 큽니다.

 

     향후 14n 부활 프로젝트를 어떻게 진행할지는 좀 더 시간을 가지고 고민해 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