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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

2016.12.17. - 월동준비 No.Ⅰ

     꽃궁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이제 내년 1월 말경 햇 복수초를 맞이하기까진 꽃 보릿고개를 견딜 만한 뭔가가 필요한 시기가 된 것이지요. 그래서 몇 가지 내 나름의 월동 프로젝트를 준비했습니다. 뭐 거창한 것은 아니고, 약간의 지름 + 잉여력 투입 정도입니다. 지난 주 말, 월동 프로젝트 중 첫 번째 계획이 일단 완료되었습니다.

 

사진출처 : 제조사 홈페이지

 

     예, 그렇습니다. 헤드폰 하나 질렀습니다. 그간 틈틈이 음악을 들어 오면서 가장 불편한 것이 소음 문제였습니다. 소리 파동을 피부로 느낄 정도로 볼륨을 높여 듣는 내 습관상 내 방에서 문 꼭꼭 닫고서 혼자 듣는 음악도 시끄러운 소음이 되어 가끔 마눌님이나 아들, 딸녀석들의 지청구 대상이 되곤 합니다. 그래서 성능이 그럴듯한 헤드폰의 필요를 예전부터 느끼고 있었지요. 지금은 많이 낡았으나 왕년엔 하이엔드 력셔리 기종으로 대접 받던, 동생으로부터 얻은 젠하이저 530 II도 있고, 기타 허접한 이어폰도 몇 개나 있는 터라 딱히 급한건 아니어서 늘 지름 순위에서 밀려나기 일쑤였고요.

 

     그러던 어느 날, 블랙 프라이데이도 끝난지 꽤 지난 시점인데, 내가 자주 들어가는 사진 포털 사이트의 해외 직구 정보에 괜찮은 헤드폰이 110 파운드에 떴다는 정보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잠깐 확인 해 보고는 뒤 돌아 볼 겨를도 없이 냉큼 질렀습니다. 그로부터 3주가 흐른 지난 금요일 밤 퇴근해 보니, 영국 아마존으로 부터 웬 찌그러진 소포가 도착해 있군요.

 


     AKG社의 K702라는 모델입니다. AKG는 오스트리아에 본사를 둔, 이 바닥에는 상당히 이름있는 회사입니다. 이 회사의 중급/고급 라인 제품 중의 하나인 K702 모델은 세계 3대 레퍼런스 헤드폰이라는 이름을 들을 정도로(물론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든 이야기겠지요) 좀 인기가 있는 기종이지요.


     11월 중순, 갤럭시S7 노트의 발화로 고전하던 삼성이 무려 9조 4천억원을 쏟아부어 미국의 '하만(Harman)'을 인수했다는 기사가 크게 났습니다. 전장(電裝) 전문업인 하만을 잘 모르는 사람도 많겠지만, 오디오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 치고 마크 레빈슨(Mark Levinson), 제이비엘(JBL), 뱅앤올룹슨(B&O : Bang & Olufsen), 하만/카돈(Harman/Kardon), 바우어앤윌킨스(B&W : Bowers & Wilkins)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겁니다. 모두 하만이 자회사로 거느리고 있는 프리미업급 고가의 오디오 전문회사들이지요. AKG 또한 그들 중 하나입니다. 삼성이 예전에 독일의 전통있는 광학 회사인 슈나이더와 롤라이를 인수했다가 단물만 빨아먹고선 헌신짝처럼 버렸던 전력이 있어 하만과 삼성의 향후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잘 되기를 바랍니다.

 

     이야기가 좀 샜군요. 세상에는 소위 '명기'로 명성을 얻고 있는 수많은 헤드폰이 있지만, '레퍼런스 헤드폰'이라는 수식어를 버젓이 달고 있는 녀석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면 레퍼런스라는게 무슨 뜻일까요? 쉽게 말하면 '기준이 되는' 헤드폰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기준이 되기 위해서는 성능의 객관성이 필요하며, 객관성은 기기 재생 특성의 충실도에서 나옵니다. 즉 오디오의 全 주파수 영역에서 고른 성능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기본 전제가 되는 것이지요. 저음에 특화되어 있다든지, 중간영역 혹은 고음 재생 특성이 특별히 좋다던지 하는 것으로는 레퍼런스의 지위에 오를 수 없습니다. 저역에서 고역까지 골고루 평탄한 재생 특성을 가져야 하니까요. 그래서 레퍼런스 장비는 최종 소비자의 감상용 보다는 음악을 프로듀싱하는 스튜디오용으로 많이 쓰인다는군요.


홈페이지에 기재된 K702의 기술 사양입니다.

지원 주파수 대역이 무려 10 ~ 39800Hz!


 

     고루 잘한다는 것, 즉 올 라운드 플레이어로서의 분명한 단점은 있습니다. 평범하다, 개성이 없다, 혹은 특징이 없다는 평을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개성'이라는 것이 달리 말하면 '왜곡'을 뜻할 수도 있기에, 제게는 이게 단점으로 와 닿지 않습니다. 개성의 발휘가 필요하다면 음원 재생기의 믹서나 이퀄라이저를 통해서 충분히 조절 가능하기 때문이지요. 아무튼 국내에선 최소 40만원, 바가지 좀 쓰면 60~70만원 정도에 구입하던 이 녀석을 단돈(?) 110파운드에 업어 왔으니 왠지 횡재한 기분입니다.



     마침 사무실 송년회를 마치고 막 귀가한 터라 취기가 꽤 오른 상태 였지만 술 깨기를 기다릴 순 없지요. 바로 개봉해서 케이블 꽃고, 앰프 켜고 청음 준비를 해 봅니다. 유닛을 들고 혹 하자가 없는지 요리조리 살펴보는데, 알콜로 정신이 혼미한 중에서도 근데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듭니다. 이런, "Made in Austria" 각인이 없네요! 불길한 예감이 살짝 듭니다. 대체 어디서 만든거란 말인가?

  


     노안에 침침한 눈으로 한참 수색해 보니 헤드밴드 안쪽 정수리와 맞닿는 구석에 행여 들킬세라 꽁꽁 숨어 있는 마데 인 치나!!! 그것도 깨알만한 스티커로 허접하게 붙어있는... 아니 이런 얍삽한 놈들이 있습니까? 위 첫 사진의 이미지엔 분명히 메이드 인 오스트레일...아니 오스트리아로 적혀 있는데. 게다가 분명 영국 아마존 판매사이트엔 원산지 표기가 전혀 없었고, AKG제품은 본사에서만 제조한다는 것이 정설인지라 당연 그런 줄 알았는데... 역시 저렴한 가격에 풀린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네요.


   

     졸지에 호갱님 되니 분기탱천, 혈압이 정수리로 치솟는 것을 꾹 참고, 따로 포장되었던 분리형 케이블을 헤드폰에 연결합니다. 이 케이블은 100% 무산소동(Oxygen-free Copper)이라는데, 이젠 이 마저도 못믿겠습니다. 길이가 3미터나 되니 여유있어 좋긴 하네요. 동봉되어 있는, 금으로 도금했다는 6.3밀리 플러그 어댑터를 보니 마음이 조금 약해지는 것도 같습니다.

 

     DAC의 하이 임피던스 헤드폰 단자에 연결하고 올해 6월 말, 독일 베를린의 발트뷔네(Waldbühne) 콘서트 실황 블루레이 앨범 리핑한 영상을 플레이 해 봅니다. 이 연주회는 매년 6월 마지막 일요일, 베를린 필하모닉이 베를린의 외곽지역에 위치한 발트뷔네 야외 원형극장에서 여는 유명한 공연인데, 비엔나의 쇤부른 콘서드, 보스턴(리낙스) 탱글우드 음악축제와 더불어 손꼽는 야외 콘서트라는군요. 올해는 '체코의 밤(Ein Tschechischer Abend)'이라는 부제를 달고, 체코 음악을 중심으로 공연되었다고 합니다. 영상에 포함된 레퍼토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당연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이며 지휘자는 캐나다 출신의 신예 야닉 네제-세궹(Yannick Nézet-Séguin)입니다.


 

        • 스메타나 : 교향시 "나의 조국" 중 블타바 (=몰다우)

        • 드볼작 : 바이올린협주곡 A단조

        • 드볼작 : 교향곡 6번 D장조

        • 드볼작 : 슬라브 무곡 8번 작품 46 G단조  

 

     초장, 블타바. 여리지만 경쾌한 목관 도입부가 흘러나오자마자 아, 이건 장난이 아니란 느낌이 팍 옵니다. 총주가 시작되고 플레이 버튼 누른지 채 30초도 안되어 신세계에 풍덩 빠져버렸습니다. 예전에 안들리던 악기소리가 선명하게 다 들리는겁니다. 안그래도 유려하고 장엄한 곡인데 해상감이 높아지니 뭐랄까요, 귀가 뻥 뚫린 느낌입니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할 뿐, 두 번째 수록곡인 바이올린 협주곡에선 그냥 넋이 나가고 맙니다. 어찌나 소리가 생생한지 바이올린의 울림통에서 나오는 소리 뿐 아니라 지판에 손가락 닫는 소리, 활의 말총이 현에 접촉하는소리까지 다 들리는군요!


     그런데 ... 독주자로 나선 리사 바티아쉬빌리(Lisa Batiashvili)의 그 미친 연주에는 완전히 정신줄을 놓아버렸습니다. 혼신을 다하는 불꽃 연주랄까요? 활이 스트링을 좌아악 훑고 올라갈 땐 정말 바이올린에 금방이라도 불이 붙어 타 버릴것만 같더군요. 자신감 넘치는 표정 연기, 아이돌 그룹 댄스보다도 더 우아한(?) 몸짓도 기본입니다. 그녀가 이런 연주자였어요. 예전 호기심에서 확보해 둔 바티아쉬빌리 음원도 몇 개 가지고 있는데, 그냥 반짝 뜨다가 말 듣보잡 쯤으로 착각하여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내가 부끄러워졌습니다. (요새 잘나간다는 율리아 피셔, 야니네 얀센, 힐러리 한, 미안하지만 이제 다 꺼져줄래? 나 오늘부터 이 아줌마의 광팬이 되기로 작정했으니!!!  아,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힐러리 한은 남겨야겠군요. ㅠㅠ) 


 

     각 트랙의 첫 부분만 조금씩 들어보며 헤드폰 반응을 점검해 보려했는데, 도저히 도중에 헤드폰을 벗을 수가 없어서 본의 아니게 위 네 곡 전부를  1시간 47분간이나 걸려 끝까지 주파해버렸습니다. 폰을 벗고 나서도 한동안 흥분이 가시지 않습니다. 이제 이 폰이 대륙제라도 상관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이 정도의 소리라면 오스트리아제면 어떻고 중국제면 또 무슨 상관입니까?

 

     이 음반(음원) 화질은 말할 것도 없고, 야외 공연인데도 불구하고 음질이 매우 좋습니다. 이 생생한 현장감은 도대체 어떤 기술을 동원해서 잡아 냈기에 스튜디오 녹음을 머쓱하게 할 퀄리티를 확보했는지 심히 궁금합니다. 블루레이 타이틀 표지엔 오디오 스펙이 DTS-HD Master Audio 5.0으로 되어 있습니다. 기술적으로 DTS-HD Master Audio는 2채널에서 24비트 심도, 192kHz까지의 샘플링을 지원합니다. 과연 리핑 과정에서 저 스펙을 그대로 다 보존했을까요? 스펙트럼 분석기로 확인해 보니,

 

 

     아쉽게도(?) 샘플링 주파수는 48kHz입니다. 일반 CD가 44.1kHz이니 이보다 약간 더 나은 수준이죠. 5채널이 아니라 2채널로 했다면 물리적 스펙이 훨씬 높아질 수 있었을텐데요. 대신 그래프는 약 22~23kHz까지 도달하고 있어 가청주파수 대역은 충분히 커버하고도 여유가 있습니다. 리핑할 때 다운샘플링과 더불어 비트 심도를 희생시키지 않을 수 없었겠죠. 이는 용량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일 것입니다. 리핑한 파일의 용량이 5기가바이트니 심도와 샘플링 주파스를 그대로 유지했을 경우 용량이 150기가바이트를 훌쩍 넘을테니 말이죠.

 

     이쯤 되니 지금 내가 만끽하고 있는 귀의 사치가 과연 헤드폰 덕분인지 콘서트 뮤지션들의 탁월한 연주 탓인지, 아니면 레코딩 엔지니어의 프로듀싱 재주때문인지 쉽게 판단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셋 다일수도 있겠지요. 중요한 것은, 아무리 빼어난 연주를 멋지게 프로듀싱했더라도 헤드폰이 허접했더라면 이런 귀 호강은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헤드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지 앨범에 대한 감상평을 적으려고 시작한 글이 아닌데 이넘의 헤드폰땜에 본의 아니게 내용이 뒤죽박죽이 된 감이 있습니다마는, 월동 준비 첫 번째 과제는 대단히 성공적인 것 같습니다. 귀 호강 뿐 아니라 바티아쉬빌리를 얻은(?) 것도 K702가 안겨 준 큰 선물이 아닐 수 없군요. 이 헤드폰의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오픈형이라서 음악 감상 중 소리가 새어나간다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