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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해외여행

서안(西安) 역사기행 #1 - Prologue

 

 

 

서안(西安) 역사기행 #1 - 프롤로그

 

      

       예정하지 않았던 출발이었다. 이번 휴가는 설악산과 지리산에서 야생화 산행이나 실컷 하는게 당초의 희망이었지만 저렴한 중국 여행 패키지를 검색해 낸 마눌님의 제의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성사된 것이다.

 

       이름난 여행지를 무리지어 가이드를 졸졸 따라다니며 주마간산격으로 대충 둘러보고 그저 인증샷이나 찍어오는, 그런 깃발 여행 패턴이 탐탁치 않았던 탓도 있었지만, 이 더운 날씨에, 그것도 찌는 듯한 중국 내륙 지방을 발품 팔아 다닌다고 생각하니 처음엔 진저리부터 났던 거다. 하지만 마눌님께서 보여 주는 여행 일정표를 보고는 마음이 서서히 기울어졌다. 책꽂이를 뒤적여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중국 역사서도 찾아 펼쳤다.

 

       어쨌든 우린 8월 3일 밤 늦은 시각, 김해공항 發 서안 行 에어부산 전세기의 트랩을 오른다.

 

 

 

    

    

       "隨唐長安, 明淸北京"

 

       중국 역사를 통틀어 볼 때,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夏)나라를 시작으로 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왕조가 명멸을 거듭했지만, 존속 기간으로 보나, 역사서에 기록된 내용으로 보나, 역사적 영향력을 보나 가장 굵직한 족적을 남긴 대표선수를  꼽는다면 수(隨), 당(唐), 명(明), 청(淸) 등 4인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당의 역사는 장안(=서안)에서, 명청의 역사는 북경에서 이루어졌고, 그 역사적 자부심을 서안 사람들은 "수당장안, 명청북경"이란 말로 함축하고 있다. 주(周)나라 무왕이 이 곳을 도읍으로 정한 이후 당나라 말기까지 1150년간 國都로 번영하였으며, 이에 비해 북경의 역사는 현재진행형이긴 하지만 560여년에 불과하다.

 

       서안(시안, Xi'an)은 중국 내륙, 섬서성(陝西省, 샨시성)에 위치한 유서깊은 고도다. 2008년도 기준 인구는 830만, 서안이 속한 샨시성의 총 면적은 한반도보다 약간 넓고 부산과 거의 등위도상에 위치한다. 로마, 아테네, 카이로와 함께 세계 4대 고도에 속한다고도 하며, 1100년을 넘는 기간에 걸쳐 國都의 위치를 지켜 나가는동안 역대 중국 역사에서 가장 많은 13개 왕조의 수도였으며, 중국 역사의 중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과거 동·서양의 문화 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실크로드의 시발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그 당시 서안이 누렸던 경제적, 정치적 힘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서안의 역사는 중국 왕조의 역사와 함께한다. 서안 지역을 중심으로 간단하게 중국 왕조의 변천사를 훑어보자.

 

      

 

 

 

 

 

      역사적으로 나타나는 중국 최초의 왕조는 BC4000년경에 세워진 하(夏)나라다. 수도는 미상이다. 기원 전 1600년경 상(商, 은殷나라 라고도 한다)나라의 탕왕이 하나라의 걸왕을 무너뜨리고 천자가 된다. 수도는 은허(殷墟)라 알려지고 있는데 과거 하나라와 상나라는 역사적 실존 국가로서의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였지만 은허의 유적 발굴 이후 상나라의 존재는 확실히 인정되었으며, 하나라의 존재는 아직 논란이 되고 있다.  어쨌든 이후에 나타난 주(周)나라의 무왕이 폭정을 일삼던 商나라의 주왕(紂王)을 무너뜨린 후 천자가 되어 지금의 서안 근처 호경에 도읍을 정하였다. 서안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이후 이민족이 침입으로 호경이 파괴된 후 근처의 낙양(洛陽, 뤄양 = 낙읍)으로 천도한 후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 BC 770-BC 221"가 시작된다. 

 

 

 

 

 

 

 

       춘추시대란 공자의 책 "춘추"에서 나온 말로, 주나라의 여러 제후국(齊, 晉, 楚, 吳, 越나라 등)들이 주 왕실을 섬기면서도 세력을 다투며 서로 약육강식을 일삼아 중국 천하가 소란하던 시기다. 공자를 비롯한 여러 사상가(=제자, 諸子)들이 출현하고, 그들을 각각 추종하던 무리들이 세를 규합하여 저마다의 학파(=백가, 百家)를 결성하여 논쟁(百家爭鳴)하던 시기로서, 중국 사상의 개화결실의 시기였다. 제자백가에는 유가, 도가, 묵가, 법가, 명가, 음양가, 종횡가, 병가, 잡가, 농가, 소설가 등이 있는데 이 중 소설가가 가장 격이 낮은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ㅎㅎ    

 

 

 

 

 

 

       

 

       이후 서서히 주나라 왕실에 대한 각 제후국들의 충성심이 약화되면서 秦, 韓, 齊, 魏, 趙, 燕, 楚라는 전국칠웅(戰國七雄)이 주 왕실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저마다 스스로 왕이라 칭하면서 천하 통일을 하겠다고 설레발을 치며 전쟁을 벌이던 시기가 전국시대(戰國時代)다. 전국칠웅 중 법가사상을 이어받은 진나라가  주 왕실 및 다른 6국을 멸하고 결국 천하 통일을 완성한다. 이 때의 인물이 진왕 영 정(嬴 政)으로서, 후일 진 시황제(秦 始皇帝)라 스스로를 칭하게 된다.

 

       진시황 사후 그간의 강압적인 정책과 무리한 토목 공사 등 폭압에 항거한 봉기가 전국에서 일어나게 되고 초나라의 장군이었던 항우가 3세황(시황의 손자)을 참살하고 도읍인 함양을 불사른 후 팽성에 도읍하여 스스로 초패왕이라 칭한다. 그 이후 진나라의 장수였던 유방이 항우를 무찌르고 한나라(前漢)을 세워 천하동일을 달성한 후 신도시 장안을 건설하고 수도를 장안으로 옮기게 된다. 장안 시대의 본격적인 서막이 되는 셈이다. 이후 왕망이 쿠데타를 일으켜 전한을 뒤엎고 신나라를 세운다. 신나라 역시 오래지 않아 각지의 반란으로 무너지고 전한의 후예가 쓰러진 한을 다시 일으켜 세워(後漢) 통일국가를 유지한다.

    

       후한도 200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황제의 외척, 환관 등의 파워게임에 시달리게 되는데 십상시의 난, 황전적의 난 등 갖가지 내우외환으로 지리멸렬하면서 군웅할거의 시대가 시작된다. 위, 촉, 오의 조조(조비), 유비 손권 등이 스스로 황제임을 내세우며 싸우던 "삼국지"의 시대, 서진, 십육국 시대, 동진, 남북조 시대 등 대 혼란을 겪다가 수나라가 이들을 평정하여 다시 천하통일을 달성한다.

 

       수나라도 무리한 원정, 특히 고구려와의 전쟁(청천강에서 깐죽대다가 강감찬 장군에게 무참하게 깨짐, 살수대첩)과 가렴주구 등으로 일찍 멸망하고 당(唐)이 등장하여 새로운 통일 국가의 기틀을 다지면서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을 활성화시켜 국제적인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된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장안(서안) 주나라 건국 이후 당이 멸망할 깨까지 1100여년 동안을 국도로서의 위치를 굳건히 지킨다. 비록 함양, 낙양 등으로 잠시 바뀌는 적도 있었으나 모두 장안 문화권이라 하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당 말기에 전란으로 장안이 황폐화되어 주전충이 수도를 동쪽의 낙양으로 천도하면서 장안은 수도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새로운 왕조가 북경에 도읍을 정하면서 장안에 대한 格下의 의미로 長자를 西자로 바꾸어 장안은 서안이 된다. 대신 북평(北平)은 북경(北京)으로 업그레이드되어 새로운 국도로서 승격한다.

      

       중국 역사, 특히 왕조의 변천사는 위키피디아(클릭!)에 잘 정리되어 있다.

 

    

       함양-서안 국제공항에 도착하니 자정을 좀 넘긴 0시 30분, 후끈한 새벽 열기가 우릴 먼저 반긴다. 그래도 한국보다는 덜 습한 듯하여 조금 안심이 된다. 호텔로 직행하여 여장을 풀고 세면탁족 후 잠자리에 누웠다.  잠을 청하려 하였지만 내일부터 펼쳐질, 거대한 역사의 현장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잠이 쉬 들지 않는다.

         

 

서안-함양 국제공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