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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해외여행

서안(西安) 역사기행 #3 - 진 2세황제릉 및 섬서성 역사박물관

 

 

 

서안(西安) 역사기행 #3 - 진 2세황제릉 및 섬서성 역사박물관

 

 

      오늘의 마지막 방문지는 진2세 황제릉과 섬서성 역사박물관이다. 진2세 황제? 조금 생소한 황제 아닌가?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왕이 죽고 나면 '~종(宗)', 혹은 '~조(祖)' 등의 묘호(廟號)를 붙이게 되는데, 이는 왕의 이름이 아니고 왕이 죽은 후에 그의 신주를 모시는 종묘 사당에 붙이는 칭호다. 그런데 진시황은 죽은 후에 조성한 능은 종 혹은 조의 묘호를 따로 붙이지 않고 그냥 '시황묘'라 부르고 있으며,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은 아들 역시 종, 조의 묘호가 없다. 이는 어인 까닭일까?

 

       천신만고 끝에 천하를 통일한 진의 왕 영정(嬴政)은 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자신을 역대 다른 왕이나 천자들과 차별화하여 격을 달리하고자 했다. '왕'의 칭호는 본인의 품위에 걸맞지 아니한다고 보고, 새로운 호칭을 구상하였는데, 결론적으로 '황제'로 결정하였다. 중국의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제왕들인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황'과 '제'를 따서 '황제'라는 명칭을 추출해 낸 것이다. 여기서 삼황은 여러 가지 이설이 있으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의하면 천황(天皇), 지황(地황), 태황(泰皇)을 말하며, 오제는《황왕대기(皇王大紀)》에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당요(唐堯), 우순(虞舜)을 뜻한다고 나와 있다.

 

       어쨌든 본인은 첫 황제이므로 시황(始皇)으로 부르게 하였고, 후대는 '이세황(二世皇)', '삼세황(三世皇)' 순으로 칭하여 진 제국이 지속 번성하기를 바랐다. 따라서 진 2세 황제능은 진시황의 아들의 능이다.

 

       진시황의 26남이자 막내아들 호해(胡亥)는 전국 순행 중 급사한 시황을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진 2세황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에도 간신들의 계략에 휘둘려 원래의 황태자였던 부소와 여러 가신들을 죽이는 등 과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 따랐다. 황제의 위치에 오르고 난 이후에도 여러 간신들에게 휘둘리던 그는 환관 조고의 사주에 의해 무기력하게도 죽임을 당하게 되고, 이어 등극한 진 3세황도 황제에 옹립된 후 2달을 버티지 못하고 한나라의 유방에게 항복하니 진나라는 허망하게도 3대 15년만에 멸망하고 만다. (진시황과 진 제국의 흥망사는 3일차 병마용갱 및 시황묘편에서 더 상세히 다룰 예정이다.)

 

 

 

 

 

       진 2세 황제릉의 입구이다. 저 건물 내부에는 간단한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건물 뒤에 봉분이 있다. 이 곳 묘역은 곡강그룹에서 2010년에 문화재 정비 차원에서  조성한 것인데,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던 묘역을 근래들어 급히 정비해서 유적지화 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만큼 2세 황제의 존재감은 미미했던 것이다.

 

 

 

 

 

 

 

       전시관에는 진2세황과는 무관한 당시의 유물 몇 점과 당시 통일 진나라의 영역을 보여주는 지도인 진국강역도가 전시되어 있는데, 여기서도 현대 중국의 패권주의로 인한 씁쓸한 역사 왜곡의 단면을 발견한다.

 

 

 

 

 

 

 

 

       위 사진을 보면, 만리장성이 평양까지 들어 와 있으며, 당시 고조선의 영역이었던 요동반도와 만주 일부를 진의 영토로 슬쩍 집어넣고 있다. 당의 침입을 막고자 고구려때 축조한 천리장성을 허물고 그 자리에 중국식으로 성곽을 다시 쌓은 후 이를 만리장성의 연장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참으로 황당한 노릇이다. 조고선이나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중국 역사의 일부분으로 편입해 가기 위한 의도적이고 명백한 역사왜곡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장차 통일 한국의 출현을 대비한 동북공정의 일부분이다.

 

       중국은 2차대전 이후 세계가 혼란한 틈을 타 티벳지구를 전격적으로 무력 점령한 후 서북공정을 가동하여 위구르족의 신장성, 티베인의 서장(티베트)성을 중국역사에 포함시켰다. 티벳의 문화를 말살하고 중국화 시키기 위하여 한족을 대거 이주시켰으며, 소수의 한족이 티벳의 정치, 경제 등 각 분야에서의 대부분의 권력을 독점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하여 달라이라마를 비롯한 티벳인들의 거센 저항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이미 이들은 탐원공정을 통해 삼황오제의 오제를 실재(實在)한 왕조로 만들었으며 내몽고지역의 홍산문화를 저들 문화의 근원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남사군도, 서사군도 조어도(일본명 센가쿠 열도), 심지어는 이어도에 이르기까지 자국의 영토 확장에 열을 올리며 베트남, 말레이시아, 필리핀, 일본, 한국 등 주위 국가와 충돌하여 영토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아무리 존재감 없다고는 하지만, 명색이 황제인데 엄청난 규모의 아버지 황제(시황)의 능과 비교해 볼 때 초라하기 그지없는 규모이다. 저 비문이 이나었다면 이것이 황제의 묘역인지 아무도 몰라볼 것 같다.

 

 

 

 

 

 

 

       섬서성 인민위원회에서 세운, '胡亥墓'라고 새긴 비문이 애처롭다. 그것도 1986년에야 설치한 것이다.

 

 

 

 

 

 

 

    

   봉분 위에는 잡초와 더불어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 차 있고, 비문의 지붕에는 잡초도 아니고 버젓이 감나무가 자라고 있어 곧 열매까지 달릴 기세인데, 벌초는 커녕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뒤로는 곡강그룹의 아파트 건설 현장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이 비운의 황제 묘소도 곧 아파트의 숲 속에 파뭍히는 신세가 될 것이다.

 

 

 

 

 

 

 

 

봉두난발한 봉분. 그 와중에도 누군가가 헌화한 국화 열 한 송이가 눈에 띈다. 누구일까, 헌화한 사람은? 

 

 

 

 

 

 

 

 

 

      

 

        다음 코스로 섬서성 역사박물관을 관람하였으나 때마침 휴일을 맞아 몰려 든 엄청난 중국 내국인 인파로 입추의 여지가 없더라. 때문에 여유있게 음미하며 관람할 상황이 도저히 안되었고, 내부가 너무 어두워 사진도 제대로 찍지 못했지만, 그중 인상적인 것만 몇 가지 올려 본다.

 

 

 

 

 

 

 

       박물관 전경

 

 

 

 

 

 

 

 

       현관 입구에 전시된 돌 해태상. 진품은 도둑맞고 모조품이 입구를 지키고 있는데, 저 크고 무거운 것을 어떻게 훔쳐갔는지 놀랍기만 하다. 과거 국공합작 말기에 장개석이 공산당에게 쫓겨 대만으로 탈출하면서 중국의 주요 문화재 대부분을 싹쓸이 해 갔기 때문에 지금 본토에는 이렇다 할 문화재가 남아있질 않는데, 그나마 전시된 것은 대개 무덤 등에서 발굴한 출토 유물이라고 한다.

 

 

 

 

 

 

 

 

 

 

       발이 3개 달린 청동 솥이다. 漢字의 '솥 정(鼎)'자는 저 형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향로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밥을 짓거나 탕을 끓이는 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고대 중국에는 청동 솥을 보유하는게 엄청난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럭셔리 솥 계의 루이 뷔똥이라고나 할까, 신분에 따라 크기와 갯수의 제한까지 있었다고 하니 그 때도 명품족은 존재했나 보다. 

 

 

 

 

 

 

 

 

 

       석굴암의 모티브가 된 불상

 

 

 

 

 

 

 

 

 

 

 

 

 

      

      이 박물관에서 가장 놀라운 발견이었다. 토기로 만든 여인像인데 어쩐지 일본풍이 진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이 여인상이 일본풍이 아니라 과거 일본 여인들이 당풍을 따른것이라고 한다. 당나라는 당시 주변국들에겐 대단한 선진국이었고, 요새 한류열풍으로 세계 각국의 젊은 아이들이 한국 아이돌 가수의 모습과 행동을 모방하듯, 당시 일본에서도 당나라의 모든 풍습을 모방하는 것이 대 유행이었다고 한다. 일종의 당류열풍(唐流熱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본의 회화나 조각 등에서 나타나는 여인들의 스타일이 당나라 스타일이었던 것이다. 나중 알고보니 화청지의 양귀비 석상도 얼굴 윤곽이나 화장법, 복식, 헤어스타일이 저 여인상의 모습과 아주 흡사하였다. 

 

 

 

 

 

 

 

 

 

순금제 장식

 

 

 

 

 

 

 

황금이 얼마나 흔했으면 ...

 

 

 

 

 

 

 

채색한 사천왕상

 

 

 

 

 

 

 

 

문인 알현상

 

 

 

 

 

 

(이상 제 1일 유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