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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해외여행

서안(西安) 역사기행 #7 - 山外有山, 西岳華山




서안(西安) 역사기행 #7 - 山外有山, 西岳華山

 

 

 

       예로부터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을 우주 질서의 기본적 원리로 삼아 온 우리는 이 땅 오행(목, 화, 토, 금, 수)의 각 방위에 해당하는 다섯 개의 산을 정하여 신령시 해 왔다. 동목(東木)方은 금강산, 서금(西金)方은 묘향산, 남화(南火)方은 지리산, 북수(北水)方은 백두산, 중토(中土)方은 삼각산이 그것이다. 이 5개의 산을 5악(五嶽)이라 부르며 계절마다 산신께 정성껏 제사를 올렸다. 우리 오악의 모델이라 할 수 있는 중국의 오악은 어떤 산일까? 동악 태산(泰山), 서악 화산(華山), 남악 형산(衡山), 북악 항산(恒山), 중악 숭산(崇山)이 그것이다. 중국의 오악은 "五岳"이라 표기하는데 비해 우리 땅의 오악은 "五嶽"이라 표기하는게 다른데, 옥편을 펼쳐 보면 '岳'은 '嶽'의 古字라 풀이하고 있으니 결국은 같은 것이 된다.

 

       어쨌든 오늘의 주인공은 중국 오악 중 西岳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화산(華山, 현지 발음 후아산)이다. 화산은 서안에서 동쪽 방향으로 120km 지점에 위치해 있고 산 전체가 화강암 통바위로 이루어져 중국 오악 중 가장 험준한 산세를 자랑한다. 동봉(2096m), 서봉(2003m), 남봉(2155m), 북봉(1615m), 중봉 등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우뚝 솟아 있는 암봉군을 아우르는 전체 모습이 꽃잎을 닮아서 花山 혹은 太華山으로 불리다가 한무제가 華山으로 이름을 바꾼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국을 상징하는 "화(華)"의 개념이 화산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니 중국을 대표하는 산 중의 하나라고 말해도 될 성싶다. 山外有山, 西岳華山, 산 넘어 또 산이 있으니 서악 화산이라, 화산으로 고고씽~

 

 

화산 가는 고속도로 주행 중에 보았던 화력발전소. 중국도 땅은 크지만 인구 대비 에너지 자원 부족 국가이다.
그래서 세계 자원 전쟁의 한가운데 뛰어들어 좌충우돌하고 있으며, 
때로는 자원을 의식한 지나친 영토 욕심으로 무리수를 두기도 한다. 

 

 

       아침 식사 후 이른 시간에 호텔에서 출발하여 서동고속도로(西潼高速公道)를 타고 1시간 30분가량 이동하니 화산 어귀의 전시관과 매표소를 겸한 건물에 도착한다. 날씨가 쾌청하면 화산의 장관이 한눈에 들어오련만, 오늘도 역시 안개끼듯 뿌옇게 흐린 공기 때문에 저 곳이 산인지 들판인지 분간조차 안된다. 어쨌든 입장권을 받아 쥐었다. $120짜리 옵션 관광 상품이다. 많이 비싸다. 왕복 케이블카 비용까지 포함돼 있지만 그래도 비싸다.

 

 

입장권

 

 

매표소

 

 

 화산행 셔틀버스

 

 

       매표소를 통과하니 너른 정류장에 셔틀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손님이 다 차면 아무때고 출발한다. 버스를 타고 산중으로 이동하는데, 차창 밖으로 나타나는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높이를 알 수 없이 수직으로 서 있는 바위 협곡이 첩첩이 들어 서 있고, 그 협곡으로 난 좁은 도로를 따라 버스가 달리는데, 오른쪽은 드높은 암벽이요, 왼쪽은 계곡물이 콸콸 흐르는 낭떠러지라 사뭇 위태로왔다.

 

 

 

 동문 방향으로 진입한다

 

 

 

동문을 지나자 이런 협곡이 펼쳐진다

 

 

 

       20분쯤 달려 케이블카 승차장에 도착하니 케이블카를 타려는 사람들의 대기열이 매우 길게 형성돼 있다. 약 한 시간을 줄을 서서 기다린 끝에 케이블카에 오를 수 있었는데, 그나마 우리 가이드가 새벽부터 분주히 움직여 팀원을 조기에 인솔하여 왔기에 망정이지 30분만 늦었더라도 2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한 시간 기다리는 동안 대기열의 길이는 거의 3배 이상으로 늘어나 있더라.

 

 

 

 

케이블카 승차 차례를 기다리는 관광객들

 

 

 

 

 

 

       6인승 케이블카는 쉴 새 없이 사람들을 내려놓곤 다른 사람들을 태우고서 다시 산정으로 향한다. 鐵索에 매달려 끊임없이 올라가는 케이블카의 행렬은 저 높은 암릉과 암릉 사이의 허공을 따라 아득히 상승하다가 자욱히 드리운 안개속으로 속속 사라지고 있었다. 총 길이는 1,554미터. "대륙의 삭도(索道)"라 다소 불안했으나 정류장 벽의 안내 동판을 보니 스위스의 케이블카 전문회사가 건설한 것임을 알 수 있어서 조금 마음이 놓였다. 긴긴 허공길 여행 끝에 남봉 바로 아래의 정류장에 도착하니귀가 먹먹해져 왔다.

 

 

 

올려다보니 아득하고

 

 

 

 

내려다보니 아찔하다.

 

 

 

 

정류소에 도착

 

 

 

 

돌계단을 오르니

 

 

 북봉 정상(1614.7m)에 도달하였다.

 

 

 

 

             화산은 도교의 영지(靈地)다. 옛날, 도가의 종조(宗祖)인 老子가 이 곳 남봉에 기거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많은 도관(도교의 사원)이 있어 도사들이 도를 닦고 있다. 예로부터 몸과 마음을 닦는 수련자들은 예외 없이 험준한 바위산에 은거하였는데 바위에 함유된 철분이 기(氣)를 응축하여 한 지점에 모아주고, 그 위에 좌정하여 기도하면 땅의 기운이 몸의 기운과 하나로 연결되어 쉽사리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라 한다. 즉 地氣가 뭉쳐 있는 장소에서 간절히 기도하면 하늘이 응답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도처는 모두 지기가 뭉쳐 있는 곳이다. 그리스의 델포이 신전, 인도의 아잔타 석굴, 모세가 십계를 받았다는 시내산, 미국 애리조나주의 세도나(Sedona), 한국의 계룡산 등은 하나같이 지기가 강하게 뭉친 곳이다. (동양학자 조용헌 교수의 "한국의 方外之士"에서 내용 인용함)

 

       대한민국 남자라면 중고등 때, 빠르면 초딩때 와룡생, 고룡, 양우생이나 김용의 중국 무협지를 한 권이라도 읽어 봤을 것이다. 책 읽기를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소오강호, 의천도룡기, 동방불패 등 그 시대를 풍미했던 중국 무협 영화를 최소한 한 두편 정도는 보았을 것이다. 중국 무협을 논한다면 소림파, 아미파, 공동파, 화산파, 무당파 등등 중원 무림의 메이저 리그라 할 수 있는 9대 문파(혹은 8대 문파, 9파1방)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9대 문파 중 메이저 중의 메이저가 화산파라 할 수 있는데, 바로 화산파의 본거지가 바로 이곳이다.

      

 

 

한 중국인 가족이 북봉 정상의 "화산논검" 비석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과거 황당무계한 싸구려 환타지쯤으로 취급받던 무협지가 중국 문학의 주류로 당당히 입성하게 된 것은 김용(金庸, 중국발음은 진융) 선생의 업적이 크다. 김용은 그의 대표작 영웅문 3부작(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를 세상에 내 놓음으로써 무협소설을 중국 역사 대하소설로 격상시켰으며,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부가 번역 출판되는 공전의 히트를 쳤을 뿐 아니라, 중국에서는 대학 교재로 채택되었고 수많은 아류작, 모작, 그의 이름을 도용한 위작이 줄을 이었다. 위 사진을 보면, 왼쪽에 서 있는 비의 "華山論劒" 비문은 김용이 썼다(金庸 題)고 돼 있고 오른쪽의 누워 있는 돌비석엔 "비설연천사백록(飛雪連天射白鹿), 소서신협의벽원(笑書神俠倚碧鴛)"이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뜻을 풀이해 보면 "하늘에 닿을듯 휘날리는 눈발은 흰 사슴을 쏘아대고, 책을 비웃는 신비한 협객은 푸른 원앙에 기대어 있다"라는 알쏭달쏭한 내용인데 사실 이 14자는 김용의 대표작 14종의 제목 첫 머리만 따서 조합한 것이다. 비호외전, 설산비호, 연성결, 천룡팔부, 사조영웅전, 백혈검, 녹정기의 첫 글자를 조합하면 '비설연천사백록'아 나온다. 

 

       김용의 대표작인 사조영웅전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이벤트는 "화산논검(華山論劒)대회"일 것이다.  화산논검이란 武學 제1의 奇書인 구음진경(九陰眞經)을 놓고 당시 중원 5대 고수(동사 황약사, 서독 구양봉, 남제 단황야, 북개 홍칠공, 중원통 왕중양)들이 화산 정상에 모여 7일간 밤낮을 꼬박 새워 무공을 겨루던 토너먼트 경기를 말한다. 이 대회에서 전진교의 宗師인 중신통 왕중양이 최종 승리를 거둠으로써 그가 구음진경을 소장하게 되며 추후 왕중양이 죽은 후 구양봉, 황약사, 매초풍 등 많은 무리들이 구음진경을 탈취하기 위하여 목숨을 건 혈투를 벌이게 된다. 첫 화산논검대회 이후 25년만에 같은 장소(화산의 論劒臺)에서 2차 화산논검대회가 또 열리는데, 이 때는 구음진경이 아니라 순수한 무공의 경연으로 성격이 바뀐다.

 

 

 

 

사진 : 김용 선생, 출처 : 인터넷

 

 

 

       화산논검대회는 떠돌던 전설과 김용 선생의 상상력의 산물이며 역사서에는 등장하지 않는 가공의 사건이다. 하지만 중원의 고수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무공을 겨루고 당대 최고의 협객을 결정한다는 설정은 매우 드라마틱한 것이어서 후대 소설가들에게 무수한 영감을 주었고 영화나 드라마의 중요한 소재로 쓰였다. 이렇게 됨으로써 논검대회의 배경이었던 이 곳 화산의 명성도 널리 떨쳐지게 되는데 특히 김용 소설의 마니아들에겐 화산은 성지나 다름없는 곳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길 중의 하나라는 장공잔도(長空棧道)가 있는 남봉까진 못가더라도 가까운 동봉까지는 가 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모자란다. 되돌아 올 시각을 정해놓고, 그 시각까지 동봉 방향으로 진행해 보기로 했다. 

          

 

 

 

 

       붉은 천에는 복을 비는 문구가 적혀 있다. '壽福吉祥', '發財健康' 등등. 안전선 역할을 하는 쇠사슬엔 '언약의 자물쇠'가 주렁주렁 달려있다. 연인들이 여기를 방문하여 사랑이 변치 않을 것임을 서로 언약하고 자물쇠를 잠근 후 열쇠를 저 벼랑 아래로 던져버리면 열쇠를 찾아 자물통을 열기 전에는 변심하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저런 이벤트를 벌인다. 우리의 언약도 저렇게 봉인할 수 있는 것이면 얼마나 좋을까?

 

 

 

 

금쇄관(金鎖關) 올라가는 벼랑길. 바위를 정으로 쪼아 만든 계단을 딛고 한 줄로 늘어서서 위태위태하게 오르고 잇다.

 

 

 

 

동봉. 시간 부족으로 멀리서 눈으로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저 멀리 금쇄관이 희미하게 보이고 뒤엔 서봉이 우뚝 서 있다.

 

 

 

 

 

 

북봉-동봉 중간의 도관.
옥황상제를 모신 법당 내부에 카메라를 들이대니 법당 현관에 버티고 선 강시 복장의 젊은 도사가 촬영을 막았다.

 

 

 

 

 

북봉정 현관을 통과하고

 

 

 

찰이애(擦耳崖)를 지나간다. '귀가 닳는 벼랑'이란 뜻이겠지?
중국인들의 작명 센스에 새삼 감탄한다.

 

 

 

 

또 화산논검비... 화산논검을 사골국처럼 우려먹는구나.
좀 더 가면 작은 평지의 매점이 나오는데 여긴 저 글을 새길 바위를 구하지 못했는지
널빤지에 '화산논검'이라 적어 세워 놓고 사진을 찍게 하더라.

 

 

 

 

 

자고화산...

 

 

 

 

 

 

 

 

약간의 공터가 있는 곳에는 늘 도교 사원이 서 있다.

 

 

 

화산 공식 모델인 짐꾼 노인. 기분 좋으면 짐을 맨 채 멋진 솜씨로 피리도 불어주신다던데,,,

 

 

 

 

옛날, 도사들이 수련하던 암혈이다.
내부에 들어가 보면 바위를 파 낸 제법 넓은 공간이 나온다.
화산에는 이러한 곳이 꽤 많은데 동굴 출입문 바로 위에는 늘 작은 구멍이 있다.
통풍과 채광을 겸하는 기능을 하는 것오로 보인다.

 

 

 

 

 

"同治8년 8월 20일 전 섬서성 포정사사 민계(?) 임수도가 여기서 놀고가다"
바위에 그런대로 잘 쓴 글씨로 새겨놓으니 뭔가 있어 보이지만, 알고보면 권력자들의, 약간의 품위를 갖춘 낙서에 불과하다.

(동치8년이면 청나라 목종 동치제 시절이고 서기 연호로는 1869년에 해당한다.)

 

 

 

 

 

거대 암봉을 배경으로 움푹 패진 바위를 화분삼아 금마타리꽃이 한무더기 피어 있다.

 

 

 

 

금마타리...일주일 전 찾았던 설악산엔 다 졌던데, 여긴 이제 절정이다.
자세히 보면 두메부추도 어울려 피어있고, 씨방 맺은 솔나리도 보인다.

 

 

 

 

 

왼쪽의 계단은 케이블카를 타지 않고 정상에 오르는 도보 등산로이다. 가파른 벼랑길에 새겨진 3,999계단을 올라야 한다는데
극히 위험한 지점이 많아 안전장구를 단단히 갖추어야 한다..

 

 

 

       오후 일정의 압박으로 북봉 언저리만 맴돌며 대충 둘러볼 수 밖에 없었는데, 중봉, 동봉, 서봉, 남봉 등을 밟아 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자니 참으로 애석하였다. 다음에 기회 있다면 개인적으로 다시 방문하여 삭도를 이용하지 않고 두 발로 걸어서 모든 코스를 두루 섭렵하고 싶다. 도보 등산로를 통하여 정상에 올라 와서 작두날같은 암릉의 작은 객잔에서 하룻밤 머물며 저녁에는 올올고봉을 붉게 물들이는 일몰을, 밤에는 천봉만학에 내려앉는 별빛을 보면서 화산의 무한한 地氣를 함뿍 느껴보고싶다. 김해-서안간은 비행기로 불과 세시산 밖에 걸리지 않으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것이다. 시간적으로는 울산-강릉행보다 더 가까운 셈이니 말이다. 화산이야말로 이번 서안 기행의 백미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상 화산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