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해외여행

서안(西安) 역사기행 #4 - 당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의 현장, 화청지

 

 

 

 

서안(西安) 역사기행 #4 - 당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의 현장, 화청지

  

       오늘은 이번 여행의 3대 하일라이트 중의 하나인 화청지(華淸池) 투어가 예정돼 있다. 화청지는 당 현종과 중국 역사상 최고의 미인인 양귀비와의 특별한 로맨스와 비극이 녹아 있는 곳이기도 하거니와 근대 중국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서안사변의 현장이기도 하다. 
 

       화청지는 질 좋은 온천수 때문에 역대 제왕들이 휴양지로 삼았으며, 일찌기 서주 시절 주유왕이 이곳에 려궁을 지었고 이후 진시황과 한무제도 여기에 행궁(行宮)을 건립하였다. 특히 당현종때 건설한 궁전 누각이 가장 화려했고 이 때 정식으로 '화청궁'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화청지


       먼저 오늘 우리의 주인공인 당 현종과 양귀비에 대해 먼저 알아보기로 하자.  
 

       당 현종(玄宗)은 이름이 이융기(李隆基: 685~762), 예종(睿宗)의 셋째 아들로 아버지 예종에게 황위를 선양받았다. 동시대의 우리나라는 통일 신라의 성덕대왕 시절이 된다. 44년간 재위하다가 황위를 물려 준 후 우울증에 시달리다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태릉(泰陵: 지금의 섬서성 포성현<蒲城縣> 동북 30리의 금속산<金粟山>)에 안장되었다.
  

 

당 현종 이융기 (사진출처 : 인터넷)

 

       이융기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연호를 개원(開元)으로 바꾸고 정치 개혁에 본격 착수하여 할아버지인 당 태종의 치세를 능가하는 업적을 쌓으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능력이 출중한 재상들을 옆에 두어 직언을 과감히 수용하였고, 유능한 지방 관리를 등용하고 탐관은 가차없이 교체하였다. 사찰과 승려 수를 줄이고 권력가들을 제압하는 한편 조정을 정비하여 상벌을 엄정히 하였으며 환관과 인척을 정사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정치를 하자 국력은 점차 강성해졌으며, 태종 이세민이 이룩한 태평성대에 버금가는 치세를 하여 후세 사람들은 '개원의 치(開元之治)'라 부르며 칭송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성군의 면모는 양귀비를 만나면서부터 급락 반전한다.
 

       훗날 양귀비가 된 양옥환(楊玉環)은 미녀가 많이 배출되는 사천성 출신이다. 어려서 부터 고아가 되어 큰삼촌 집에서 성장하였으며 피부가 백옥같이 희고 허리는 가늘고 몸이 풍만하여 당시의 미녀상에 걸맞는 신체 조건을 갖추었다고 한다. 또한 춤과 악기에 능하여서  16세의 나이에 궁녀로 뽑혀 입궁하게 된다. 입궁하자마자 출중한 미모 덕분에 이융기의 18남이자 후일 황태자에 책봉되는 이모(利瑁)와 결혼하게 된다.
 

  

모란꽃을 좋아했던 양귀비를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그린 미인도 (사진 출처 : 인터넷)


       한편 이융기는 그가 사랑했던 무혜비가 죽자 방황하기 시작한다. 3천명이 넘는 궁녀 중 어느 누구도 그의 마음을 끌지 못하자 조정에서는 채홍사를 파견하여 전국에서 미녀를 발굴해 진상(?)하였지만 아무도 황제의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화청지에서 열린 연회에서 춤을 추던 한 여인을 보고 바로 첫눈에 반하게 된다. 이융기는 당의 황제 중 가장 춤을 좋아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 여인을 목격한 후 자나깨나 그 춤추는 여인의 자태가 눈 앞에 아른거려 만사가 손에 잡히지 않았고, 결국 당대 최고 권력가이자 환관인 고력사를 시켜 그녀를 데려오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그의 며느리 아니던가? 낙담한 그에게 고력사는 미리 준비했던 계책을 착착 실행에 옮긴다. (연회에서 춤을 추게 한 것도 이융기의 눈에 띄도록 고력사와 양옥환이 미리 꾸민 것이라는 일설도 있다.)
 

       아무리 무소불위의 황제일지언정 인륜을 무시하고 현직 며느리를 취할 순 없는 법, 고력사는 그녀를 도교의 승려(도사)로 만들어 화산의 태진궁이라는 절로 출가시켜 자연스럽게 이 모와 이혼하게 하고, 이 모는 변방으로 파견해버린다. 말이 파견이지 변방에서 싸우다 죽으란 얘기나 다름없는 조치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또 있다.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였던 측천무후는 원래 '무조'라는 이름의 당 태종 이세민의 여자였다. 이세민이 죽은 후 아들 이치가 황제(고종)이 되었는데, 이치는 아버지 생전 아버지 이세민을 간호하던 무조의 미모에 반하여 은근히 마음에 두고 있었던터라, 황제에 오른 후 무조로 하여금 머리를 깍게 하여 비구니로 만들어 감업사란 절에  출가시켰다가 다시 데려 와 자신의 후궁으로 삼는다. 아버지의 여인을 취하기 위하여 그 여인을 도사 또는 승려로 만들어 '과거 세탁'을 하는 꼼수를 부린 것이다. 이후 무조는 갖은 술수를 동원하여 황위를 찬탈, 결국 황제의 자리를 꿰차게 된다.
 

       양옥환을 손에 넣은 이융기는 그녀를 귀비(貴妃)에 책봉한다. 그녀를 위해서 '황후'도 아니고 '비'도 아닌 '귀비'라는 개념을 창시해 낸 것이다. 이후 당은 망조의 그늘이 드리워지고 서서히 기울기 시작한다. 귀비로 책봉한 후 이융기는 귀비의 친가에 파격적인 특혜를 베풀기 시작한다. 우선 죽은 귀비의 아버지에게 대위제국공이란 벼슬을 하사하고 귀비의 숙부나 친오빠들에게도 높은 벼슬을 내렸을 뿐 아니라 별 볼일 없었던 그녀의 세 언니까지 궁궐에 불러들여 국부인으로 책봉하니 양씨 일가의 세도가 하늘을 찌르는 지경이 되었다.  특히 건달이었던 사촌 오빠인 양검에겐 국충(國忠)이라는 이름을 내리는데, 소인배이자 간신배인 국충은 나중 승상의 위치에까지 올라 국정을 마음대로 농단하게 된다.
 

       양귀비는 네 가지를 좋아하였는데,
 

       ① 석류를 좋아하였다. 하루에 반드시 반조각씩 먹었는데, 처음엔 이란에서 수입하여 제공하다가 아예 석류나무를 옮겨 심었다. 이후 서안은 중국에서 석류가 가장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 되었고, 지금도 서안을 대표하는 꽃(市花)이 바로 석류꽃이다.  화청지 내에도 수많은 석류나무가 심어져 있다.
 

  

석류 (사진 출처 : 인터넷)

 

         ② 여지(荔枝, 중국발음 : 리즈)라는 과일을 좋아하였는데, 열대 과일이어서 장안에서 1,500km나 떨어진 사천, 계림에서 공수해 와야 했다. 또한 해발 2000m나 되는 천령산맥을 넘어야 했는데,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날라 왔다. 또한 선도 유지를 위해 수확한 지 3일 내에 무조건 도착해야 했기 때문에 도중에 18개의 정거장을 설치하여 릴레이식으로 운반해 왔다고 한다.

  

여지 (사진 출처 : 인터넷)

  

       ③ 대추를 좋아했다. 서안은 지금도 중국의 주요 대추 산지이다.
 

       ④ 목욕을 좋아했다. 워낙 풍만한 몸매여서 땀이 많아 하루에도 몇 번씩 목욕을 했는데, 목욕을 자주 할 수 없는 겨울철에는 현종의 동계 휴양지인 화청지 온천에 옮겨 살다시피 했고, 현종의 어탕 옆에 귀비 전용 욕탕(해상탕)을 만들어 주었다.
 

       또한 양귀비가 울린 네 남자가 있는데
 

       ① 먼저 당연히 첫 남편인 현종의 아들 이 모

 

       ② 뜻밖에도 지금도 한시의 시선(詩仙)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李 白(李太白)이다. 이백은 원래 카자흐스탄 출신인데 실크로드를 따라 장안까지 흘러 들어 와 하류 인생으로 떠돌던 것을 그 천재성을 알아 본 한 스님의 주선으로 입궁했다. 당시 신하들은 근본을 알 수 없는 이백의 입궁을 반대했으나 시와 술을 좋아했던 현종이나 양귀비가 그를 보호하여 궁에 눌러앉게 했는데, 현종은 그를 친구처럼 대했다고 한다. 특히 천하의 주당이던 이백과 양귀비는 시와 술로써 맞짱뜨며 자주 놀았는데 술에 취한 귀비의 모습을 감상하는 것이 현종의 크나큰 기쁨이기도 했다. 술과 시와 춤은 귀비의 3대 주특기였으니 이보다 더한 찰떡궁합은 없을터였다.  그러던 이백은 어느 날 하루아침에 화청궁에서 쫓겨나게 된다.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빼앗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과 어긋난다고 은근히 빗대 말했는데, 현종의 마음이 편할 리 있겠는가?  현종의 미움을 산 이백은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태백산으로 들어 가 평생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③ 네째는 안록산이다. 안록산은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근처 돌궐족 출신인데 일족들이 혼란을 피하여 중국으로 넘어 와 정착하였다. 30대에 무관으로 성장하여 변방 방비를 잘 하여 현종의 신임을 얻어 절도사의 벼슬을 얻고 궁으로 들어왔다. 황궁에 등장한 젊은 안록산은 곧 귀비와 친해지게 되는데 귀비를 처음 본 순간부터 뜨거운 연정을 품게된다. 어덯게든 양귀비와 가까이 하고싶던 안록산은 귀비에게 양자로 받아달라 간청하고 현종과 귀비는 이를 허락한다.
 

       귀비는 안록산을 양자로 받아들이고 성인식 잔치를 베푸는데, 이 때 목욕까지 친히 시켜주었다고 한다. 이후 안록산은 본인보다 19세나 어린 귀비를 어머니라 부르며 자주 후궁에 드나들며 밤새도록 귀비와 함께 있으면서 처소를 떠나지 않다가 아침에나 나오는 일이 잦게 된다. 당시 현종의 나이 61세, 한창 젊고 끼 많은 귀비의 더운 피를 식혀주기엔 너무 늙었다. 그런 귀비가 쪼그라진 영감보다도 체중 200kg의 당당한 체구를 가진 젊고 팔팔한 안록산에게 훨씬 매력을 느꼈음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④ 현종 자신이다. 안록산이 난을 일으킨 이후, 반란군에게 이리저리 쫓겨 다니다가, 배신한 호위병들의 강요로 귀비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을 요구할 때 얼마나 피눈물이 났겠는가?
 

       안록산이 입궁 후 궁궐 돌아가는 꼴을 보니 가관이었다. 황제라는 사람은 국정엔 아예 손을 놓아버린 채 양귀비에게 눈이 멀어 정신을 못차리는데, 온갖 간신배, 아첨꾼이 국정을 농단하고 있고, 특히 귀비의 오빠 국충이 귀비의 위세를 등에 업고 환관 고력사와 담합하여 황실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모습이 볼썽사나웠던 것이다.
 

       양국충은 양국충대로 황제의 환심을 사서 점점 세력이 커지는 안록산에게 위기를 느끼고 그를 견제하게 되는데 갖가지 구실을 붙여 이융기에게 안록산을 모함하였다. 그 때마다 귀비는 그를 변호하여 위기에서 구했다. 결국 이것이 안록산이 반란(안사의 난)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
  

       변방으로 복귀한 안록산은 서기 725년, 양국충 타도를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낙양을 한바탕 휩쓸고 장안으로 밀고 들어간다. 안록산이 화청지를 불태우고 장안성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전갈을 받은 조정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맞서 싸우자는 주장과 판세가 불리하니 일단 몸을 피하고 보자는 주장이 대립하였는데, 결국 현종과 귀비 및 양국충 등은 호위 군사들을 거느리고 야음을 틈타서 사천 방면으로 몰래 도주하게 된다.
 

       도피하던 도중 마외역(馬嵬驛)에 이르렀을 즈음 평소 양국충의 전횡에 불만을 품었던 호위병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이번 사태의 화근인 양국충의 목을 벤 후 사지를 찢어버린다. 그리고는 황제를 압박하여 양귀비마저 죽이라고 시위를 벌인다. 황제는 완강히 거부하다가 호위병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는 하는 수 없이 귀비에게 자결할 것을 요구하고 목을 맬 비단을 하사한다. 양귀비는 슬피 울면서 황제에게 절을 올리고 역관 불당 옆의 배나무에 비단을 걸어 목을 매니 이 때의 나이가 38세였다.
 

       두 양씨가 죽은 후, 황태자 이형이 황제에 오르고, 이융기는 황위를 내놓고 태상황(太上皇)으로 물러난다.  다행히도 새 황제 이형이 제법 현명하여 돌궐로 친히 가서 동맹을 요청하여 성사시켰고, 이에 안록산의 세력도 주춤하게 되면서 다시 당은 서서히 안정을 되찾는다. 이후 안록산이 그의 아들에게 죽임을 당한 후 더 이상 조정에 위협이 되지 않게되자 태상황은 비로소 장안으로 복귀하여 감로전에 칩거한다. 그 후에는 죽은 귀비에 대한 그리움과 흘러간 옛 영화에 대한 허무함으로 병을 얻어 762년 5월 쓸쓸히 붕어하니 그 때의 나이가 78세였다.

       호텔을 출발하여 화청지로 향하면서 머리 속으로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틱 드라마를 머리속에 그려보았다. 입장권을 손에 넣고 구름같은 인파에 섞여 화청궁으로 진입하였다. 성수기라 입장료는 1인당 110위안, 당시 환율이 190원 정도였으니 우리 돈으로 2만원 약간 넘는 금액이니 그리 싼 편이 아닌데 관람객은 넘쳐나기만 한다.

   

 입장권

  

 

 뒤의 여산(驪山)을 배경으로, 연꽃 핀 화청지가 조성되어 있다.

 

       조금 더 들어가니 또 다른 연못이 있는데, 이 연못이 밤에 공연될 가무쇼인 장한가(長恨歌)의 수중 무대이다. 그냥 통로처럼 보이는 연못 안의 저 구조물은 장한가 쇼의 움직이는 무대 역할을 할 것이며, 수면 하에는 수많은 조명과 기계장치들이 숨어있다. 산 아래 보이는 누각 및 정자 내부에도 각종 조명, 와이어 액션 기계, 음향시설, LED 스크린 등 장한가 쇼를 위한 특수효과 장비가 가득 들어 차 있다. 무대 뒤로는 여산이 있는데, 이 여산 전체가 거대한 스크린으로 이용된다. 산꼭대기에는 케이블 카가 설치돼 있어 관광객들을 쉴 새 없이 실어 나르고 있었다.

  

 

 

  

 

       양귀비기 그렇게 좋아했다는 석류나무는 화청궁 내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있다. 석류나무 아래 어떤 중국 미녀(?)가 석류나무의 정기를 받으려는 듯 한동안 자리를 뜨지 않더라. 미인은 과연 석류를 좋아할까?

  

우거진 회화나무 잎새 너머로 현종과 귀비의 전용 목욕탕 건물이 보인다.

 

       화청궁 내부에는 석류나무 뿐 아니라 회화나무도 많이 자라고 있었다. 중국을 비롯한 동양권에서는 예로부터 회화나무를 최고의 길상목(吉祥木)으로 여겨 왔다.  이 나무를 집안에 심으면 가문이 번창하고 큰 학자나 큰 인물이 난다고 하였다.  또 이 나무에는 잡귀신이 감히 범접을 못하고 좋은 기운이 모여든다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예로부터 이 나무를 매우 귀하고 신성하게 여겨 함부로 아무 곳에나 심지 못하게 했다.  회화나무는 고결한 선비의 집이나 서원, 절간, 궁궐같은 곳에만 심을 수 있었고 특별히 공이 많은 학자나 관리한테 임금이 상으로 내리기도 했다.  회화나무는 모든 나무 가운데서 으뜸으로 치는 신목(神木)이다. (자료참조 : http://kherb.com.ne.kr/herbstory/14h-11.htm)

   

 

 

 

황제 전용 욕실인 어탕 입구를 알리는 표지석

  

      
       현종의 분부로 지어진 귀비의 전용 욕탕. 1인 욕탕이어서 아담한 규모이며, 바닥에는 온천물의 입수구와 배수구가 설치되어 있다. 탕 내부에는 중국인들이 던진 동전이 보인다.
 

 

귀비의 전용탕엔 "해당탕(海棠湯)"이라는 이름이 현판이 붙어 있다. 

 

연화탕(蓮華湯)탕은 현종의 전용탕이다. 

 

어탕(御湯)답게 규모가 꽤 크다

  

 

       연화탕 내부에는 백거이가 현종과 귀비의 애절한 사랑을 시로 옮긴 "장한가(長恨歌)" 의 각 테마를 그린 그림과 함께 싯구가 탕 내부의 벽을 따리 전시되어 있는데, 위 사진은 그 테마의 도입부로, "한황중색사경국 (漢皇重色思傾國) 어우다년구부득 (御宇多年求不得) 양가유녀초장성 (楊家有女初長成), 양재심규인미식 (養在深閨人未識)"으로 시작되는 장한가의 첫 4행이다.

  

       당 황실의 요리사 및 고위 관리들을 위한 대중탕인 "상식탕(尙食湯)"의 내부.

  

태자 전용탕인 "태자탕(太子湯)"

 

     

         양귀비와 현종 등 역대 중국의 황제들이 즐긴 온천수는 지금도 샘솟고 있으며, 관광객들이 황제의 온천수를 체험할 수 있도록 시설을 만들어 놓았다.  

 

 

       목욕탕 입구에는 옥석으로 깎아 만든 양귀비의 석상이 세워져 있는데, 귀비가 목욕을 마치고 탕에서 나오는 모습을 형상으로 만든 것이다. 실물보타 훨씬 크게 만들어 별 감흥이 없다. ㅡㅡ; 등신대로 만들어 세웠더라면 더 실감이 났을텐데... 뒤로 아름드리 회화나무가 보인다. 

 

       

역시 양귀비의 석상이 가장 인기 아이템이었다. 석상 앞에는 양귀비의 후예들이 모여 누가 더 예쁜지 미모 경쟁을 하고 있다. 

 

"어정헌(御淨軒)" ... 이름은 그럴싸하지만 화장실이다. 

 

 

       화청궁 내부의 또다른 이색적인 나무가 도처에 자라고 있다. 대추나무 위로 감나무를 접목한 하이브리드 나무다. 중간에 접목한 흔적이 선명한데, 저렇게 하면 감이 크게 자라지 않고 대추보다 약간 큰 크기가 되며 당도가 꽤 높다고 한다. 그 감도 양귀비가 좋아했을까?

  

 

       오늘 밤 장한가 쇼를 관람하기 위해 다시 오기로 하고 화청궁을 나선다. 화청궁의 저 현판은 중국 근대의 작가, 시인, 극작가, 고고학자, 고문학자이자 공산당 정치가였던 곽말약(郭沫若; 1892~1978)이 적은 것이다.

 

 

       화청궁을 나서 관광버스가 기다리는 주차장으로 걸어가는데, 왼편에 여산으로 진입하는 게이트가 있고, 그 현판엔 "여산(驪山)"이라는 심상치 않은 필체가 눈에 뜨인다. 자세히 보니 唐代 뿐만 아니라 중국 역사상 최고 명필의 한 분인 안진경(顔眞卿)의 글씨다. 안진경은 양귀비나 현종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인물로서, 안록산의 난(안사의 난)때 의병을 거느리고 조정을 위해 싸운 바 있다. 아마도 안진경이 저기에 직접 적어 조각한 육필은 아닐거고, 模寫나 集字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도 예사롭지 않은 포스가 뿜어나온다. 

 

여산 삭도(케이블카) 입구.

 

복숭아가 맛있어 보인다고 하자 가이드가 봉지 가득 사서 한 개씩 돌렸는데, 맛은 그다지 ... 

 

길거리의 옥수수장수

  

(이상 화청궁 기행 끝)

다음 이야기는 "현종과 귀비의 애절한 사랑 : 장한가 가무 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