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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

2016.05.14. - 피안을 향하여 날아가는 한 마리 나비 : 나비춤을 구경하다


     오늘은 불기 2560년 부처님 오신 날.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마눌님을 모시고, 인근 절 3곳을 들르는 순례 행각에 1일 운전 기사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마눌님의 공사다망한 주간 스케쥴 때문에 올해 아침은 매우 이른 시각에 집을 나섰고 덕분에 사찰 방문 일정을 일찍 마치게 된다. 구청의 행사장에 잘 모셔 드리고 나니 시간이 많이 남아 이맘 때 쯤 피고 있을 갯봄맞이 서식지인 바닷가를 찾아 보기로 하다.


     서식지 가는 길, 금천의 마애석불 근처를 지나치는데, 이 곳에도 부처님 탄신일 잔치가 거나하게 펼쳐지고 있는게 보인다. 저 멀리서 보아도 산자락에 오색 찬란한 연등이 줄줄이 걸리고, 참배객들이 떠들썩 북적이는 모습이 사뭇 장관이다. 요새 이곳이 많이 개발되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최근 와 보지 않았던 터라 개발된 마애불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몹시 궁금하여 잠시 차를 세우고 올라가 살펴보기로 했다.

 

     논밭이었던 마애불 아래 평지엔 '마애사'란 현판을 단 번듯한 불당이 들어섰고 주위엔 없던 주차장도 깔끔하게  만들어 놓았다. 상사화, 개별꽃, 등대풀, 산자고, 갓, 울산도깨비바늘 등이 기타 들풀들과 어우러져 어지럽게 자라던 마애불 진입로 언덕은 방금 벌초라도 한 듯 말끔하게 정비되었고, 꽃 필 때 가끔 찍으러 오던 누리장나무는 흔적이 없이 사라졌다.

 

     불도 예전 그 버려진 마애불이 아니었다. 바위 앞엔 불단이 차려지고 큼직한 복전함(福田函)도 버젓이 놓였다. 옆에는 돌을 갈면서 소원을 빌면 한 가지는 들어준다는 돌할매까지 모셔왔다. 법당에서 마애불로 연결되는 꼬불꼬불한 언덕길을 따라 오색 화려한 연등 지그재그로 이어진 그림이 제법 볼 만한 풍광을 연출한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매우 유서깊은 사적임에도 불구하고 금천 야산 중턱의 무성한 잡초밭에 거의 버려지다시피 세간의 관심에서 소외되었던 마애불이 부처님의 무슨 가피를 별안간 입었는지 불과 몇 년 새 화려하게 컴백한 것이다.


     마애불 언덕을 올라 가 보니 주지인 듯한 스님이 마애불 옆 땡볕 아래 우산을 받쳐 쓰고 약 30여명의 대중을 모아놓고 쩌렁저렁 마이크로 사자후(?)를 연신 토해놓고 계신다. 아마도 봉축법요식이 거행되는 중인 모양이다.







     그런데 마애불 앞에 차려진 야단(野壇)에 다소곳이 좌정한 채 대기하고 있는 한 인물에 눈길이 간다. 산스크리트어의 옴마니반메훔 문양과 연꽃이 새겨진 삼베 고깔, 울긋불긋 화려한 오색 띠로 장식된 순백색 박사 장삼(薄紗 長衫)을 입은 여인이다. 장차 뭔가 재미있는 퍼포먼스가 진행될 모양이다. 당연히 강한 흥미가 느껴져 갯봄맞이는 잠시 미루고 기다려 보기로 했다.








     주지스님 설법은 청산유수 달변이었다. 이 곳을 이만큼 일으켜 세울 정도의 수완이면 대단한 비즈니스 감각의 소유자일 것이다. 훗날에도 이 마애사의 역사가 계속 이어진다면, 아마도 중건조(重建祖)로서, 두고두고 이름이 남을 만한 업적을 세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소 장황한 법문이 끝나고, 이윽고 앰프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의 선률에 맞추어 춤사위가 시작되었다. 말로만 들었던 나비춤이다. 나비춤은 바라춤, 법고춤과 더불어 불교의 3대 의식무다. 양 손에 흰 연꽃 한 송이씩을 들고 춤사위를 펼치는데, 석가 세존께 꽃을 바치는 공양을 춤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육법공양(六法供養)"이라 하여 불전에 여섯 가지를 공양하는데, 향(香), 등(燈), 꽃(花), 차(茶), 쌀(米), 과일(果)이 그것이다. 이들은 각각 지계(持戒), 지혜(智慧), 인욕(忍辱), 선정(禪定), 보시(布施), 정진(精進)을 의미하며 중생이 고해(苦海)로부터 해탈하여 피안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여섯 가지 실천 항목인 육바라밀의 개념과 그대로 닿아있다. 그래서 어느 법당에 가 보아도 이 여섯가지 공양물은 항상 구색을 갖추고 차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중 꽃은 인욕을 상징한다. 꽃을 공양하는 것을 육법공양 중 으뜸으로 친다고 한다.


      불교 경전에서, 주요한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꽃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부처의 전생인 설산동자(雪山童子)가 치열한 정진을 통해 법을 구할 때, 사람을 잡아먹는 흉악한 나찰(羅刹)로부터 "생멸법(生滅法)"에 대한 법문을 전해 듣고 크게 기뻐하여 기꺼이 그 몸을 배고픈 나찰의 먹이로 던지던 찰라, 본래의 모습인 제석천(帝釋天)으로 되돌아 간 그 나찰이 설산동자를 가볍게 받아 안는 그 순간 하늘로 부터 꽃비가 내린다. 




제행무상(諸行無常) 법문을 듣고 깨친 후 나찰에게 기꺼이 몸을 던져 보시하는 설산동자





     석가가 룸비니 동산에서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 나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면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외칠 때도 옮기는 걸음 걸음마다 연꽃이 피어나고 있다. 그 뿐인가? 영취산에서 설법하실 때도 꽃비가 내렸고, 석존이 그 중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자 제자 중 오직 마하가섭만이 그 의미를 알아차리고 빙그레 웃었다는 염화시중의 설화는 그 중 대표라 할 수 있다.


     요컨대 불교에서의 꽃은 바로 완벽한 우주이자 극락 그 자체이며 만행(萬行)의 상징이다. 경전에 묘사된 극락 세계는 마당이 칠보로 덮여 있고 여러 가지 꽃들로 향기가 그윽한 곳이다. 그래서 극락 왕생을 바라는 중생들은 꽃으로 극락 같은 환경을 만들어 부처를 공양한다. 온갖 인고의 세월을 견딘 후에 꽃이 화려하게 피어나듯이,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행을 해야 한다. 또 불교에서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에 꽃비가 내리면 모든 중생이 해탈한다고 한다. 
















     춤사위는 약 15분간 진행되었다. 아다지오 또는 라르고 정도의 템포로 우아한 동작이 물 흐르듯 끊임 없이 연결되었으며, 팔 동작에 따라 흰 장삼의 넓고 긴 소매가 바람에 팔랑거리는 모습은 과연 한 마리 나비였다. 왜 이 춤이 나비춤으로 불리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잊혀지지 않는 것은, 춤은 추는 주인공의 표정 연기다. 시종 일관 시선을 아래로  깔고 춤 동작을 펼치는데, 그 표정이 어찌 저리도 슬프고 애처롭게 보이는지. 꽃 공양이 인욕(忍辱)을 통하여 해탈의 길을 걷겠다는 서원(誓願)을 부처께 올리는 행위의 표상이라 한다면, 저 표정은 인욕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중생 고통을 상징하는 것일까? 천신만고 거센 고해 속을 헤치고 유영하여 마침내 피안의 세계에 다다르는 한 마리 나비?








 

     사방에 조아려 절을 올리고 마지막으로 불전에 쓰러지듯 투지(投肢)하여 연꽃 두 송이를 공양하는 것으로 나비춤은 마무리되었다. 























     공연의 주인공이 비구니 승려인 줄 알았는데, 나중 옷을 갈아 입을 때 보니 일반 여인인 듯하였고, 의상을 챙겨다니는 가방에 "ㅇㅇㅇ전통무용연구소"라는 로고가 박혀있는 것으로 보아 오늘 공연을 위하여 초청된 것 같았다. 내가 여기 도착하기 전에 바라춤 공연도 하였다는데, 이걸 놓쳐 참 아깝다. 미리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공연은 농악대 풍물 놀이로 끝났다.

















     이후 바닷가로 이동하여 원래의 미션인 갯봄맞이 친견을 완수하다.

 

     갯봄맞이를 찍으면서도, 그 무희의 비감 어린 표정과, 불전에 공양한 하얀 연꽃 두 송이가 내내 환영처럼 머리 속을 떠 다녔다.

     어느 새 내 마음 속에도 연꽃 두 송이가 피어나 자라는 것일까?. 


     2016.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