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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국내여행

2018-01-10 소백산 적설기 산행

     오랜만에 블로그 포스팅 해 봅니다. 혼자 소백산 다녀왔습니다. 올해 단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된 심설 산행을 하고자 계속 날씨를 체크해 왔는데, 드디어 강설 후 청명한 하늘이 예상되는 날을 발견하고는 바로 산행을 결심하였습니다. 다소간 충동적일 수도 있지만, 이런 일은 필이 꽃혔을 때 바로 실행에 옮기지 않고 미적거리다가는 결국 때를 놓치기 십상이어서 부정적인 생각이 머리 속에 채워지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여 일사천리로 진행하는게 마땅합니다.


     다음 날 아침 8시 44분 기차편으로 출발해야 해서 시간이 좀 빠듯하군요. 결심이 서자마자 바로 장비 꾸리기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사실 준비랄 것도 별로 없어요. 배낭 꺼내고 사진기 챙기고 배터리 충전하고 옷가지 챙기고 동계 장비 꺼내 점검하고 두 끼 때울 음식과 약간의 간식 확보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아 중요한 게 빠졌네요. 1박을 위해서 대피소 예약하는 일입니다. 국립공원 예약 사이트에 접속하니 평일이어서 그런지 자리는 많이 여유가 있군요. 기차 표도 예매하고요. 


     소백산 예보를 보면 오늘(1/9)인 화요일 오전까지 눈, 수요일(1월 10일)은 가끔 흐림, 모레 목요일은 맑음이어서 10~11일 1박 2일 산행의 타이밍이 매우 좋습니다. 다만 예보상 최저 온도가 -20도, 최대 풍속이 18m/s여서 환산 체감 온도 -40도의 만만치 않은 혹한이 예상되는데, 이 정도로 춥지 않다면 겨울 소백을 찾을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작년에 홑바지를 입고 나섰다가 비로봉 매서운 블리자드에 하반신이 냉동될 뻔한 곤욕을 호되게 치렀던 터라, 올해는 매리노 울 100%라는 얇은 내복 바지를 하나 사서 껴입은 것이 작년과 다른 점입니다. 

 

(PC에서는 사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어요)


 

   

     출발 당일, 일어나자마자 창 밖을 내다보니 간밤에 눈이 살짝 내려 온 동네가 엷은 눈으로 살포시 덮였습니다. 기분 좋은 징조가 아닐 수 없어 내심 쾌재를 부릅니다. 눈 구경하기 힘든 울산에 이 정도 눈이 쌓였다면 심산엔 더께로 쌓이겠죠. 조금씩 날리던 눈발은 역 플랫폼에 나서자 함박눈이 되어 펑펑 내립니다.


 

     12시 10분경 풍기역에 도착합니다. 시간 여유가 있어 근처 마트에 들러 부식거리와 간식 약간 구입하였습니다. 점심 식사를 위해 적당한 식당을 물색하던 중, 요새 보기 드문 연탄재가 쌓인 곳을 발견하고 고민 없이 들어섰습니다. '풍기돌솥밥상'이라는 식당인데 "골목 속에 숨어있는 진짜 맛집"임을 자부하는 저 간판의 자신감에 끌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인분 8천원짜리 곤드레밥 정식입니다. 최소 중급 이상의 퀄리티는 되는 것 같군요. 반찬도 형식적이지 않고, 되직하게 끓인 뚝배기 된장이 꽤 좋습니다. 다만 주문을 받은 후에 1인용 돌솥에다 쌀과 곤드레를 넣어 밥을 지어야 해서 그런지 금방 써빙되지 않고 조리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립니다. 덕분에 1시 40분쯤 출발하는 희방사행 버스를 놓칠까봐 내내 마음을 졸여야 했네요. 차려지자마자 허겁지겁 먹느라 맛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했던 것이 좀 아쉽습니다. 다행히 하루 몇 대밖에 없는 버스는 아슬아슬하게 탈 수 있었습니다.


 

     희방사 입구 종점에서 하차하여 조금 걸으면 공원 지킴터가 나오는데 여기서 희방사에서 징수하는 2천원의 문화재관람료라는 것을 지불해야 합니다. 반 강제로 걷는 문화재관람료는 늘 입맛이 개운치 않지만 그냥 좋게 생각하기로 합니다. 얼어붙은 희방폭포는 눈에 덮혀 표지판이 없었다면 폭포인지도 모르고 지나갈 뻔했습니다.


 

     희방사로 연결되는 제법 아득한 높이의 철계단이 계곡 벼랑을 따라 놓여 있습니다. 왼쪽 아래 희방폭포의 얼음기둥이 보이는군요.


 


     인기척 하나 없이 적설과 적막 속에 잠긴 희방사. 뽀드득뽀드득 내 발자국만이 텅 빈 듯한 공간에 고요를 깨고 가득 울릴 뿐입니다. 작은 소란을 피우는 느낌이 들어 미안한 마음에 후딱 한 바퀴 돌아보고 바로 등로로 접어듭니다. 여기서부터는 제법 가파르고 긴 오르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땀 뻘뻘 흘리며 급한 삐알길을 약 한 시간 가량 오르다 보면 희방깔딱재를 만납니다. 이번 산행 루트에서 사실상 가장 힘든 구간입니다. 여기서부턴 길이 많이 유순해져서 큰 어려움 없이 주 능선까지 주파할 수 있습니다.

 

 

     이제 나뭇가지에 핀 눈꽃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정상부로 갈 수록 눈꽃은 점점 무성해지는군요.


 

     연화봉에 도착합니다. 예상보다 바람이 세지 않아 그리 춥진 않습니다.


 

     정상에서 북쪽을 바라본 풍경입니다. 시정이 양호하여 가까이로는 제1연화봉과 저 멀리 눈 덮힌 비로봉이 아주 잘 보입니다.


 

     남쪽으로는 소백산천문대가 가깝고, 그 뒤로 오늘의 목적지인 소백산 기상관측소 겸 연화봉 대피소가 손에 잡힐 듯 앉아 있군요. 적절한 바람과 차가운 기온을 계속 유지해서인지 사방에 설화가 가득 피었습니다. 희방사에서 예까지 오는 과정에서 상고대가 거의 안보여 이번 산행이 꽝이 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완전한 기우였네요.


 

     대피소로 향하는 임도에도 눈이 많이 쌓여있는데 공무 차량이 수시로 통행하는 곳이라 제설이 잘 되어있습니다.


 

     제설 장비가 분주히 움직이며 차량 통행로를 확보하고 있군요.


 

     대피소 입구까지 왔습니다. 이 길을 계속 가면 죽령고개가 나옵니다. 저 뒤로 구름에 가린 도솔봉과 묘적봉이 누워있습니다. 올여름엔 저 곳으로 솔나리를 보러 와야하는데요.


 

     대피소에 도착하여 침상을 배정 받고 라면과 커피 끓일 생수 2리터(3천원)도 여기서 조달했습니다. 오늘 밤 덮고 잘 담요도 1장(2천원) 빌립니다.

 

     다른 국립공원의 대피소와는 달리 여긴 외부 전력 공급이 되니 전기 쓰는 것은 자유로운 편입니다. 덕분에 마이크로웨이브 오븐도 밖에 내 놓고 아무 때나 쓸 수 있도록 배려하는군요. 전기 공급을 자가 발전 시설에 의지하는 다른 대피소는 그 곳에서 판매한 식품만 데워줍니다.


 

      주요 하산지점에서 이용할 수 있는 버스 운행 시간이 집대성(?)된 시간표가 로비에 게시되어 있어 큰 도움이 됩니다.


     침상에 짐을 내려놓고 저녁 식사거리만 꺼내 챙기고 햇반 하나를 오븐에 데워 식당동으로 향합니다. 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오는 습기와 삼겹살 냄새! 벌써 대여섯 팀의 산객들이 불콰한 얼굴로 고기 굽고 찌개 끓여 술과 함께 왁자지껄 유쾌하게 떠들며 만찬 중이군요. 오늘의 메뉴는 햇반과 라면 오뎅탕입니다. 물을 넉넉히 붓고 라면과 오뎅을 통째로 넣어 푹 고은 후 먹기 직전에 김치를 투하하여 한 소끔 끓이면 꽤 맛난 오뎅탕이 완성됩니다. 200ml 짜리 휴대용 소주를 반주로 삼아 홀짝이는데, 이놈의 소주 맛은 우찌 이리 쓰기만 하고 맛이 없을까요? 여기까지 짊어 지고 온 게 아까와 다 마시긴 했지만 역시 혼술은 할게 못됩니다.

     소박하지만 배부른 식사를 마치고 침상으로 되돌아옵니다. 딱히 할 일이 없어 내일 아침 식사거리를 미리 챙겨둔 후 담요를 펴고 자리에 일찌감치 누웠습니다. 아직 8시도 안됐는데 침상 건넌편의 아저씨는 벌써 요란하게 코를 골고 계십니다. 약간 알딸딸 취기 속에 코골이 소리를 감상하다가 얼핏 잠이 든 듯한데, 오스스한 한기에 눈을 떠 보니 벌서 새벽 1시입니다. 폴라텍 긴팔 티 하나만을 걸치고 자긴 좀 춥군요. 방 중앙 통로에 이동식 전기온풍기 한 대가 있었는데 남녀 커플 산객이 언젠가부터 자기들 쪽으로 방향을 돌려 독점하니 나를 포함한 다른 산객들에겐 뜨신 바람이 전혀 도달하지 않아요. 다소 괘씸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습니다.

 

   가벼운 패딩 하나를 꺼내어 겹쳐 입고 누우니 한결 낫습니다. 다행히 바닥에서 냉기는 올라오지 않습니다. 잠 들기 전 솔로였던 코골이 소리는 장마철 연못의 맹꽁이떼 소리처럼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바뀌어 온 방이 우렁찬 불협화음으로 가득하군요. 이것도 다 대피소 합숙의 맛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잠을 청해봅니다. 

      

 

     다시 깨었는데, 전전반측 뒤척이다가 쉽사리 잠을 청할 수 없을 것 같아 별이나 구경할까 하여 바람막이를 걸치고 바깥으로 나와봅니다. 밤새 바람이 많이 거세졌네요. 하늘에는 세찬 바람에 구름이 휙휙 날아다니는데 그 사이로 가끔 별빛이 보일 뿐입니다. 복도에 걸린 전광판에 실시간으로 기온이 나오는데, 비로봉은 지금 영하 22도!

 

     약간 여유있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행장 정리하여 다시 길을 나섭니다. 도중에 일출을 맞이했는데, 지면 가까이에 낀 엷은 구름층때문에 해가 뿌옇게 보입니다.  


 

     막 떠오른 햇살에 눈이 붉게 물듭니다.


 



     동편 햇살과 서편 하늘의 그라데이션이 예뻐서 한 장 찍어봅니다.


 

     해가 뜬 후 구름이 서서히 걷히고 있습니다. 청명한 하늘이 예감되니 기분이 매우 업됩니다. 


 

 

 

     아직 덜 걷힌 구름 속으로 비로봉이 살짝 모습을 드러냅니다. 


 

     어제 지나 왔던 연화봉을 다시 오릅니다. 능선에 오르자마자 소백산다운 찬바람이 씽씽 불어 옴 몸을 움츠리게 하니 여기가 겨울산임이 실감이 납니다. 렌즈 교환을 위해서 잠시만 장갑을 벗어도 손은 시리다 못해 미칠듯이 아려옵니다. 당분간 렌즈 교환을 포기하고 광각으로만 찍기로 마음을 바꿉니다.


 

     벌써 대피소가 멀어져 레이더 타워 머리만 살짝 보이는군요.오른 쪽 첨성대를 모티브로 한 건물은 스쳐 지나온 소백산 천문대의 천체 관측 타워입니다.


 

     본격적으로 상고대가 펼쳐집니다. 

 

 

     이 얼마나 그리던 장면인가요!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언덕이 말간 햇살에 하늘 빛을 띄어 푸스르름하게 반사되고 있습니다. 시리게 청명한 하늘, 눈옷 두텁게 입은 하얀 나뭇가지, 푹푹 빠지는 눈, 얼굴이 깨지는 듯한 찬 공기 ... 이 모든 것들이야말로 적설기 산행의 이데아!라고 할 만합니다. 


 

      상고대 사이로 저 멀리 능선 위에 천문대가 살짝 보입니다.

 

 

     제2 연화봉으로 오르는 계단길도 멋진 상고대 세상 속에 누워있습니다.

 

 

     데크 계단 전망대에서 바람이 좀 자는 듯하여 망원렌즈로 갈아끼고 연화봉을 당겨보았습니다. 이 장면을 찍는 사이에 갑자기 바람이 휙 불어 와 오른쪽 장갑 한 쪽을 저 아래 벼랑으로 데리고 가버리는군요. 데크 위에서 목을 길게 빼고 저 아래를 아무리 찾아 봐도 날아간 장갑의 종적을 찾을 길 없습니다. 설령 눈에 띈다 하더라도 그걸 찾으러 벼랑같이 가파른 비탈을 내려 갈 엄두도 나지 않는 장소이긴 합니다. 졸지에 외톨이가 된 내 왼쪽 장갑. ㅠㅠ; 다행히 챙겨 간 백업 장갑이 있어 오른손 동상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상고대 너머로 보이는 천문대

 

 

     마치 하늘길로 통하기라도 하는듯 제1연화봉에 맞닿는 데크. 아마도 이 순간 세상에서 제일 멋진 계단길이 아닐런지요?


 

     제1연화봉에 도달합니다. 거의 산객이 없어 혼자 온 소백산을 독채 전세낸 듯합니다.



     전인미답의 눈길. 세찬 바람에 날려 온 눈이 계속 쌓여 길이 사라졌지만 간혹 나타나는 표지판과 리본을 이정표로 삼고, 그것마저 보이지 않는 곳은 감각을 총 동원하여 등로로 추정되는 곳을 찾아 진행합니다. 러셀 수준의 산행이어서 힘은 상당히 들어도 기분은 하늘을 날고 있어요. 

 


     그렇게 진행하다가 길을 잃고 한동안 방황도 합니다. 작은 봉우리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길이 애매해지길래 통과하기 수월해 보이는 봉우리 왼편으로 트래버스하기로 작정하고 눈을 헤쳐나가는데 점점 눈이 깊어져 계속 앞으로 나아가기가 어렵습니다. 한 쪽 발을 디디면 발끝이 한없이 빨려 내려가고 스틱을 꽃으면 도무지 바닥에 닿질 않습니다. 거의 허리까지 빠지는군요. 마치 하얀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꼴이랄까요?

 

  

   그렇게 헤매다가 더 이상 진행이 불가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과감히 원 위치로 되돌아 왔습니다. 이번엔 봉오리 오른 쪽을 공략합니다. 한결 편한 곳을 한동안 진행하니 다행히 눈더미 밖으로 드러난 가이드 로프를 발견하여 길을 제대로 잡았는데, 덕분에 약 40분을 생노가다 하였네요. 


 

     철쭉나무도 어린 소나무도 온통 흰눈을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천동삼거리에 거의 다 와 갑니다.


 

     비로봉, 국망봉을 거쳐 늦은맥이재로 연결되는 능선이 손에 잡힐 듯 아주 가깝게 보입니다.

 

     "여름에 만나요"


      아무렴요, 여름에 또 만납시다.


 

     혼자라는 것이 너무도 아까운 순간들입니다.

 


 


 

     천동삼거리입니다. 정면으로 보이는 저 목책을 따라가면 다리안 방향으로 하산합니다.


 

     주목감시초소에도 아무도 없는 듯합니다. 휴일이었다면 잠시 칼바람을 피하여 간식을 취하려는 산객들로 북새통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차디찬 눈을 가득 이고 시린 바람도 씩씩하게 견디며 겨울을 나고 있는 주목 군락입니다.


 

     비로봉에 거의 도달해 갑니다. 연화봉에서 여기까지 어느 곳 하나 설산답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비로봉 직전의 마지막 계단. 작년 이맘 때 왔을 땐 뼛속까지 시린 바람이 세차게 불어 몸을 가누기 힘들 지경이었는데, 오늘은 그 정도는 아니어서 한결 걷기가 수월하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비로봉의 바람은 명불허전이라, 바람에 노출된 살갗은 무수한 바늘에 무수히 찔리기라도 하는 듯 엄청나게 아려옵니다. 산객이 이 곳에 오래 머무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모양새라고나 할까요? 정상 인증샷 몇 장만 찍고 얼른 발걸음을 옮겨야 했습니다.

 


     이 구간이 작년에 제대로 경을 쳤던 마의 구간입니다. 작년 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차갑고 세찬 바람의 기세에 눌려 거의 도망가다시피 하산 방향으로 잰 발걸음을 옮겨야 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거짓말처럼 바람이 뚝 그칩니다. 하산하는 내내 거의 바람기를 느낄 수 없어 지옥에서 천국으로 갑자기 들어선 느낌.



     이제 산객들을 조금씩 만날 수 있군요. 이 아름다운 상고대 터널의 향연은 잣나무 조림지를 통과하면서부터 막을 내립니다.


 

     이후 대폭 편안해진 길을 터벅터벅 겉다 보면 금세 날머리인 어의곡 마을에 도착합니다.


 

     1:50분 출발 단양행 버스시각까지 약 30분의 여유가 있어 아이젠, 스패츠 벗어 챙겨 배낭 정비하고 옷 매무새 고칠 시간이 충분합니다.


 

     환승을 위해 들른 안동역 근처에서 쇠고기국밥 한 그릇에 막걸리 한 통을 안주삼아 늦은 점심 겸 무사 하산 셀프 자축파티를 하였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