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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예화

2017.05.06. - 아카시아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아까시나무)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이탈리아 작곡가 마스카니의 오페라 "까발레리아 루스띠까나(Cavalleria Rusticana)"에 나오는 도입부의 합창곡이다. 평소 이런 류의 음악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저 곡의 제목 정도는 한 번 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제목 자체에서 풍겨 나오는 봄의 감성이나 정서적인 느낌이 사뭇 강렬하여 마치 잘 뽑은 광고 카피처럼 뇌리에 각인되고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힘이 있어서일 것이다.


     베르디, 푸치니, 로씨니 등의 거장들이 만든 불멸의 이탈리아 오페라가 많지만, 부활절 시칠리아 섬의 봄을 노래한 저 곡으로 하여, 마스카니라는 당시 무명 작곡가의 1막짜리 이 소박한 오페라는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작품이 되었다고 한다. 시칠리아 섬에 가 본 적도, 오렌지 꽃을 구경해 본 적도 없는 나로서는 오렌지 향기가 어떤 것인지 알 길이 없지만, 이 합창곡을 듣고 있으면 부드러운 산들바람에 실려오는 어떤 봄의 꽃의 향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봄 날, 시칠리아 섬을 뒤덮는 오렌지 꽃 향기가 있다면, 우리의 봄날엔 아까시나무 꽃이 있다. 아까시야말로 우리의 봄을 대표하는 향기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연휴가 끝나가는 토요일, 때는 화란춘성(花爛春城), 만화방창(萬化方暢)지절이라 꽃 대목을 맞았는데도 최근 영축산에서 다친 발가락 때문에 행동을 자제하고 모처럼 집에서 근신하느라 좀이 쑤실 판인데, 창 밖에서 솔솔 풍겨 오는 이놈의 아까시 향기가 끝끝내 내 마음을 헤집어놓는다. 아련한 저 향기는 "향긋한고 달달한 꿀을 준비해 두었으니 얼른 이리로 놀려오셔요" 라고 벌들을 비롯한 곤충들에게 보내는 아까시나무의 노골적인 유혹인데, 꿀벌도 아닌 내가 왜 이토록 마음이 설레는 것인지?


     

     몇 번 갈등하다가 결국 사진기 대충 챙겨 들고 동천강 뚝방의 아까시나무 군락진 자전거도로로 홀리듯 진출하였다. 과연 꽃은 절정으로 흐드러지고 있다. 손 뻗으면 바로 닿을 지근 거리에서 대책 없이 풍겨오는 짙디 짙은 그 향기엔 정신이 아찔한 정도였다. 하지만 향에 취해 좀 어지러운들, 그러다가 잠깐 쓰러진들 뭐 대수냐? 저 꽃길을 천전히 걸으면서 나는 내 몸과 마음의 모든 감각을 활짝 열어놓고 그 농밀한 아까시 향을 폐부 깊숙히 빨아들여 음미하였다.



     진달래나 감꽃(감똘개)처럼, 아까시나무 꽃도 "먹는 꽃"이었다. 먹을 수록 배고픈 꽃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어릴 적엔 저걸 송이째 따다가 들고 걸어다니면서 먹기도 하었다. 모든 것이 부족하던 시절, 단 것에 대한 갈증을 잠시나마 해소해 주던 고마운 꽃이었던거다. 예전엔 몰랐는데, 아까시나무는 꽃도 잎도 모두 식용이 가능하다고 한다. 활짝 피기 직전의 꽃이나 영글기 전의 어린 꼬투리를 따다가 생채 샐러드로 먹어도 좋고 튀김으로 요리해도 특별한 맛이 난다는 것이다. 잎 또한 데치치 않고 나물로 무쳐 먹는다고 하는데 과연 어떤 맛일지 심히 궁금하다. 내년엔 나도 한 번 실행에 옮겨 볼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식물을 "아카시아"로 불러왔다. 친숙한 '국민 동요'가 된 '과수원길'의 가사에도 '아카시아'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국가에서 명명한 정식 명칭은 "아까시나무"다. 학명으로는 Robinia pseudoacacia L.로 표기한다. '아카시아'는 아까시나무와 완전히 다른 열대 식물이다. 아까시나무는 원래 북아메리카에서만 자라던 나무였으나 스페인의 로빈Robin 대령(일설에는 프랑스의 원예가 로뱅)이 유럽에 첫 전파하였던 공적을 기려 식물학자 린네가 '로비니아Robinia'라는 속명(屬名)을 붙였고, '가짜'라는 뜻의 라틴어 접두어 'pseudo-' 를 붙여 '프세우도아카키아 pseudoacacia" 라는 종으로 명명한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구한 말 일본인 사카키가 인천 공원의 조경수용으로 첫 도입하였다고 알려졌고, 본격적으로 이 땅에 광범위하게 퍼지기 시작한 것은 6.25 동란 이후 황폐해진 산의 복구와 연료림 조성을 위하여 대규모로 식재하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고 한다. 번식이 잘 되고 생장이 빨라 사방오리나무와 함께 대표적인 사방목으로 각광받았다. 우리나라의 산림녹화 사업이 세계적으로 유례 없는 성공을 거둔 것은 이 아까시나무의 역할이 매우 컷다는 것이 정설이다. 60년대, 전국적으로 한창 사방사업이 진행되면서 아까시나무 묘목 값이 덩달이 치솟았는지 씨앗을 제법 높은 가격에 사 들이는 업자들이 있어서 한때 고향마을엔 아이들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아까시나무 씨앗을 채취하러 산으로 들로 쏘다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그런데 언젠가 "아까시나무 유해론"이 퍼져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일본인이 한반도의 산림을 황폐화시킬 목적으로 들여왔다거나 아까시나무가 왕성하게 세력을 뻗치면서 참나무나 소나무 등 우리 고유의 수종을 고사시키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숲 가꾸기 운동' 등의 캠페인에서 제거 1순위로 지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이후 학자들이나 전문가들에게 의하여 부정되었다. 아까시나무가 가져다 주는 여러 가지 효과는 긍정적인 측면이 월등히 크기 때문에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심고 가꾸는 것이 바람직하다는것이다. 우선 아까시나무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밀원 식물이다. 한국양봉협회의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연간 양봉(주로 꿀 생산)산업 규모가 약 4천억 가량인데 이 중 70~80%가 아까시나무를 밀원으로 한다니 아까시 없는 우리나라의 꿀은 생각조차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아까시 꿀은 당도, 투명도, 영양가면에서 월등하여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아까시나무는 목본이지만 콩과(科) 식물이다. 콩과 식물의 주특기인 공중 질소 고정 능력이 있어 땅을 비옥하게 하는 질소비료 공장 역할을 한다. 콩과 식물은 뿌리혹을 가지고 있는데, 이 뿌리혹의 박테리아가 대기중의 질소를 빨아 들여 모든 식물의 필수 영양원인 암모니아질소를 생성해 토양에 공급하는 것이다. 특히 일년생인 다른 콩과 식물과는 달리 다년생이어서 지속적으로 암모니아 비료를 만들어 토양을 비옥하게 해 준다. 다른 식물이 자라지 못하는 척박한 땅에 아까시나무를 심으면 스스로 비료를 생산해 생장해 내면서 땅을 점차 비옥하게 탈바꿈시키고 다른 식물의 생장을 돕는 개척자 역할까지 한다니 이보다 더 가상한 일어 어디 있겠는가? 


    

      다른 식물을을 몰아내고 땅을 차지한다는 것도 오해라고 한다. 양지식물인 아까시나무는 단일 수종으로 군락을 형성하여야만 생존할 수 있다. 다른 수종들 이미 터잡아 살고 있는 곳에는 들어가지 못할 뿐더러 아까시나무 주위에 다른 수종들이 추후 들어 와 자라면서 그늘이 형성되면 쉽게 도태되어버린다고 하니 우린 지금껏 정 반대로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 뿐만이 아니다. 최근엔 이 나무가 목재로서의 효용성도 주목받고 있다. 목질이 치밀하고 단단하며 수분 함량이 적어서 습기에 강하고 잘 썩지 않아 유럽에는 고급 인테리어재로도 널리 활용되고 있다. 예전 달구지 바퀴를 만들 때 참나무나 아까시나무를 썼는데, 참나무는 단단하지만 수분 함량이 많아 무거운 반면, 아까시나무 바퀴는 단단하면서도 가벼워 더 고급으로 쳤다고 한다. 요컨대, 아까시나무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명태같은 고마운 존재다.



     아쉬운 것은 개화 기간이 7일 내지 10일 정도로 매우 짧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꿀을 채취할 수 있는 기간이 매우 한정적이어서 양봉업자들은 지역별 개화 시기를 잘 파악하여 벌통을 계속 이동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고, 나 같은 한량(?)에겐 오감을 자극하는 아련한 향기에 취할 수 있는 기간이 너무 짧아 아쉬운 것이다. 



     알고보면 이 아까시나무만큼 '아낌없이 주는 나무'도 드문 것같다. 구름 위를 산책하듯 이 흐드러진 향기의 바다에 몸을 풍덩 내던진 채 아까시나무 터널의 자전거길을 걸으면서, 내가 꿀벌이 되어 이 꽃 저 꽃을 옮겨다니는 부질없는 상상도 잠깐 해 보았다. [끝] 



    ※ 이 글을 작성하는데 참조한 사이트 : 농촌진흥청, 서울대학교 생명과학연구소, 한국양봉협회, 인디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