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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화

2016.08.02~03 - 설악산(서북릉-공룡릉) 여름 야생화 트레킹 (1/2)

1. 계획

     여름 휴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휴가 기간엔 설악의 서북릉-공룡릉을 타며 야생화를 만나보리라는 계획은 오래 전부터 머리속에 정해 둔 바 있습니다. 지난 주 남덕유행도 이번 설악 트레킹을 앞둔 예행 연습의 의미도 있었지요. 지금까지의 나의 설악산행은 거의 늦봄-초여름에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여름의 식생, 특히 공룡릉의 야생화가 몹시 궁금하던 터였습니다. 이번엔 명색이 휴가 기간인지라 산정에서 하룻 밤을 유숙하며 산중의 밤 정취를 맛보는 동시에 시간적으로도 여유있는 산행을 하기로 했는데, 함께 할 꽃동무가 없어 이 좋은 순간들을 홀로 맞이해야 하는게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입니다. 

2. 대피소 예약

     국립공원관리공단의 대피소 예약사이트에서 정규 예약 시점에 부킹을 성공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특히 요즘같은 성수기엔 더욱 그러하지요. 그래서 정규시간 예약 시도는 애초에 포기하였고, 대신 취소표 획득을 위한 매복작전에 들어갑니다. 매복이라는게 별건 아니고, 그냥 시간 날 때마다 예약사이트에 로그인하여 취소표가 나왔는지 확인해 보는 것입니다. 숙박일이 임박할 수록 취소표를 획득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대략 7월 마지막 주 부터 예약 사이트 모니터링을 간간히 하였고, 네닷세 쯤 지나니 8월 2, 3, 4일 각각 대기 예약가능한 표가 떠서 냉큼 대기를 걸어 둡니다. 그로부터 사나흘 지나니 8월 2일 중청대피소 예약 전환 메시지가 날아오네요. 8천원 결제하면 예약 확정됩니다. 지금껏 대기 예약 걸어서 실패한 예가 없습니다.

3. 준비

     8월 2/3일의 설악산 일대 일기예보는 구름 많음과 소나기가 예고되어 있어서 판초 우의와 고어텍스 소재 부니햇 모자를 먼저 챙겼습니다. 배낭에 레인 커버가 있긴 하지만 많은 비를 대비하여 배낭 속의 모든 물품은 스며드는 빗물에도 젖지 않게 비닐로 소포장을 하였지요. 조리 시간 소모와 무게를 줄여보려고 버너와 코펠 없이 모든 식사를 비가열로 해결할 수 있는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집에서 햇반 3개를 미리 전자오븐에 데우고 반찬은 오뚜기 즉석 식품(짜장, 제육 덮밥 소스, 카레)을 챙겼고, 간식으로는 에너지바, 방울토마토, 진하게 탄 블랙 커피, 물 2리터와 얼린 맥주 1캔, 오이 3개가 전부입니다. 

     대신 장비는 또 욕심을 내었습니다. 바디는 코닥을 가지고 가고 싶었으나 악천후와 광량 부족에 대비, 하드웨어 신뢰성이 높은 니콘의 D810을 선택했고, 렌즈는 15mm 어안, 16-35mm, 60mm Macro, 105mm Macro, 28-300mm 줌렌즈를 챙겨넣었습니다. 삼각대에 보조 물통, 등산 스틱까지 까지 배낭 옆구리에 꿰어 차니 무게가 또 17kg을 훌쩍 넘어버립니다. 어휴, 실력도 안되면서 무슨 사진 장비는 그렇게도 미련하게 메고 다니는지... 내가 생각해도 내 스스로가 한심해집니다. 요새 스마트폰의 카메라 성능이 웬만한 DSLR 뺨치는 세상인데, 이것 저것 다 때려치고 가벼운 미러리스나 하나 들고 다니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언젠가 그럴 날이 오겠지요.

4. 교통

     가장 애매한 것이 교통편입니다. 울산에서 속초로 가는 심야버스도 없고, 부산에서 출발하여 포항 경유 속초행 심야 버스는 현장 구매밖에 안되고, ... 선택은 한 가지 뿐입니다. 심야 버스로 동서울터미널 가서 거기서 한계령 경유 속초행 첫 버스를 타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동서울발 속초행 강원여객 버스는 인터넷 예약이 가능하군요.

5. 주요 목표

     역시 이 계절 대청봉을 대표하는 바람꽃과의 만남이 가장 큰 목표이고, 금강초롱과 솔체꽃도 주요 타겟입니다. 설악 여름 풍광은 덤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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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2일 새벽 1시 10분 발 심야 버스를 타니 동서울종합터미널엔 대략 5시 20분경 도착합니다. 약 1시간의 여유가 있어서 근처의 24시간 설렁탕집에서 갈비탕 한 그릇으로 아침 식사를 대신합니다. 배가 제법 든든하여 산행 의지가 불끈 솟아나는군요. 

     한계령 경유 속초행 첫 차는 6:30입니다. 경춘고속도로를 타고 인제, 원통, 한계령을 경유하여 속초로 가는 직행버스편입니다. 휴가철인데도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교통 체증이 거의 없어 8:40분경 한계령에 도착합니다.



     한계령휴게소에서 잠시 마무리 준비를 한 후 9시 정각부터 산행을 시작합니다. 설악루에 올라보니 아래로 한계령휴게소 주차장과 저 멀리 점봉산이 손에 잡힐듯 보이는군요. 도착 무렵엔 구름이 가득했으나 점차 개면서 파란 하늘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일단 날씨 덕을 좀 볼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 듭니다 ... 마는,



▲ 솔나리

     입산 통제 초소를 지나 첫 바위를 돌아드니 솔나리가 나를 반깁니다. 주위를 살펴 보니 군데군데 솔나리가 눈에 띄는군요. 세상에, 솔나리가 이렇게 흔한 꽃이었던가요? 다만 정점을 지나 시들기 시작하는 모습이 눈에 역력합니다.



▲ 왜솜다리

     왜솜다리를 뜻하지 않게 철계단 아래에서 만났습니다. 이번 트레킹에서 만나리라 전혀 계산에 넣지 않았던 녀석인데, 덤 치고는 꽤 휼륭한 덤입니다.



▲ 새며느리밥풀

     산행 내내 만난 며느리밥풀은 대부분 새며느리입니다. 숲 가장자리를 저렇게 도드라진 붉은 색으로 장식해 주고 있네요.



▲ 금마타리/잔대/여로/산꿩의다리(좌 상단 부터 시계 방향)

     금마타리는 완전히 지고 씨방을 달고 있습니다. 잔대, 모시대 등 초롱꽃科 식물들도 한창 제철이고, 여로는 꽃을 떨구고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여로의 열매가 꽃에 비해 엄청 크게 열리는군요. 산꿩의다리도 분홍색으로 씨를 맺고 있습니다.



      도중의 한 돌출 바위에 올라보니 한계령 삼거리에서 대청으로 이어지는 서북 능선의 남쪽 사면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보면 귀때기청봉(1577.6m)과 저 멀리 안산(1430.4m)이 조망됩니다. 


▲ 동자꽃

     

▲ 금강초롱

     이번 트레킹의 주요 목표 중 하나인 금강초롱이 드디어 목격되기 시작합니다.



▲ 흰도라지모시대

     보라색의 도라지모시대가 탈색된게 아니고 처음부터 희게 태어난 흰도라지모시대도 만납니다.



     한계령 삼거리에 도착합니다.  시간 여유가 많아 주위의 많은 꽃을 둘러보며 설렁설렁 올라 왔기 때문에 평소보다 2배가 걸렸군요.



▲ 서덜취/나래박쥐나물/도라지모시대/금강초롱(좌 상단 부터 시계 방향)

    


     한계령 삼거리를 통과할 무렵 갑자기 주위가 슬금슬금 몰려드는 운무에 휩싸이기 시작합니다. 운무는 점점 짙어져서 10미터 앞이 안보이고, 급기야 후두둑후두둑 빗방을이 떨어지기 시작하는군요. 급히 배낭 레인 커버를 씌우고 판초우의를 뒤집어 씁니다. 



▲ 개시호/참나물/어수리/말나리(좌 상단 부터 시계 방향)

     이윽고 세찬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합니다. 목에 걸었던 카메라는 판초 속으로 집어넣고 빗물이 들이치지 않게 판초의 스냅 단추를 다시한 번 단속합니다. 소나기를 피할 장소도 없어서 빗물 흘러 넘치는 등로를 그냥 철벅철벅 걷습니다. 신발 속은 다리에서 흘러내린 빗믈로 이미 흠씬 젖어서 질척대는군요. 우의 밖은 빗물로 흠뻑 젖고, 안은 땀으로 흥건히 젖습니다. 카메라 장비만 아니라면 차라리 판초 벗어 던지고 그냥 온 몸을 비에 맞기고 싶은 생각 간절한데, 그럴 순 없죠. 바람은 그다지 심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리고나 할까요.

▲ 둥근이질풀

     시원하게 내리는 비에 샤워한 예쁜 둥근이질풀을 만나니 카메라 젖는 것쯤이야 두렵지 않습니다. 판초 자락 들추고 카메라 꺼내서 후딱 한 컷 누르고 다시 판초속으로 집어넣습니다.


▲ 미역취/바위채송화/단풍취/흰진범(좌 상단 부터 시계 방향)



▲ 나래박쥐나물/도라지모시대/바위떡풀/인가목 열매(좌 상단 부터 시계 방향)

     약 한 시간 가량 세차게 내리던 비가 끝청에 도착할 무렵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하는군요. 빗줄기가 가늘어진 틈을 타서 주위에 보이는 대로 셔터를 눌러보았습니다.



▲ 등대시호

     중청봉을 조금 앞두고 소낙비는 완전히 그쳤습니다. 방금 내린 비를 함뿍 머금고 있는 등대시호가 참으로 청초해 보이는군요. 



▲ 등대시호의 다양한 모습



▲ 네귀쓴풀

     대청봉을 중심으로 이 일대에는 네귀쓴풀이 군락지어 서식하고 있습니다. 꽃봉오리가 연분홍으로 물드는 늦여름~초가을쯤의 네귀쓴풀이 가장 아름답죠.


 

     저 아래 용아장성 능선 너머로부터 흰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 바위구절초

     바위구절초, 네귀쓴풀, 등대시호, 산앵도, 산오이풀 등이 한데 어우러져 살고 있는 작은 천상화원입니다. 가을이 성큼 느껴지지 않나요?



▲ 둥근이질풀

     등로 깊섶엔 둥근이질풀이 비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축 늘어져 있군요. 비가 조금 더 마르면 싱싱한 모습으로 다시 일어서겠지요.



     산모롱이를 돌아서자 저 아래 중청대피소가, 그 뒤로 대청봉으로 올라가는 등로가 눈 앞에 나타납니다. 비선대 계곡 방면에서 피어오른 운무가 능선을 휘어감아 타 넘고 있네요. 중청대피소를 스쳐 지나 바로 대청봉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바람꽃 빨리 만나야지요!



▲ 바위떡풀



▲ 금강초롱

     우선 등로변에 피어 있는 금강초롱부터 만나기로 합니다. 잔대, 모시대를 포함한 초롱꽃科 식구들 가은데 가장 기품있는 꽃이 이 금강초롱일 것입니다. 청사초롱같이 잘록한 저 허리 라인이 정말 환상적이지 않나요? 고귀하게 짙은 보라색은 말할 것도 없고요!



▲ 금강초롱

     멀리 갈 것 없이 탐방로에 밟히는 것이 금강초롱입니다.


     정상을 밟는다는건 내게 별 의미가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예까지 왔으니 예의상 올라 가 봅니다. 국립공원 직원 2분이 정상 표지석에 새로 페인트 덧칠을 하고 계시는군요. 비 탓인지, 평소 인증샷 찍느라 인산인해를 이루던 이 곳은 매우 한산합니다.



▲ 잔대와 금마타리의 아름다운 동숙



     다시 중청대피소 방향으로 내려 와 바람꽃 군락지에 도달해 보니 벌써 탐화인(探花人)들이 좋은 포인트에 자라잡고 촬영 삼매경에 빠져 있군요.



▲ 바람꽃

     올핸 바람꽃의 개화 진행이 예상보다 많이 빠른 편입니다. 예까지 오는 도중 행여 덜 피었을까 걱정했는데 웬걸, 벌써 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일주일만 더 늦게 왔더라도 이삭 줍기만 하다 하산할 뻔 했네요.



▲ 바람꽃

     뙤약볕이 최고조에 이르는 한여름, 대청봉을 비롯한 고산에만 피는 녀석이라 땀 한 바가지를 조공하지 않고선 만날 수 없는 꽃이죠? 땀 한 바가지가 아니라 한 동이를 갖다 바치더라도 끝끝내 와서 일생에 한 번 정도는 친견할 만하지 않나요? 


 

▲ 바람꽃

     저 아래 공룡릉의 날카로운 암봉을 배경으로 찍어야 제맛인데, 그 곳에 머물고 있는 구름이 끝끝내 자리를 비워 주지 않는군요. 뭐 이대로도 충분히 좋습니다.

 


▲ 바람꽃 모음

     수십 종의 바람꽃속 중 어떤 접두어도 붙지 않은 원형 그대로의 바람꽃입니다. (생물학적으로도 바람꽃속(屬)의 원조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남바람꽃과 가장 많이 닮은 듯하고, 심지어는 저런 선연한 분홍빛깔이 나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 가는다리장구채

     이 곳에 오면 바람꽃과 이웃해 사는 가는다리장구채도 잊지 마세요.



     1시간 이상을 바람꽃과 노닐다가 중청대피소로 내려옵니다. 대피소 주변엔 구릿대와 참당귀기 있는 풀밭 뒤로 운해가 가득 펼쳐집니다.



     중청대피소도 많이 붐비지 않습니다. 산객들의 절반 이상이 동아리에서 단체로 산을 찾은 대학생들이군요. 그 싱싱한 청춘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침상을 배정 받고 담요 1장을 대여하여 배정된 자리에 짐을 두고 식사꺼리와 카메라 챙겨 밖으로 나옵니다.



    오늘의 디너는 햇반에 즉석 짜장입니다. 좀 궁상스럽고 불쌍해 보이는게 흠이지만 이래봬도 꿀맛입니다. 옆 테이블 삽겹살 지글지글 굽는 냄새 하나도 부럽지 않아요. 어차피 이번 산행은 먹방하러 온 게 아니니 말이죠. 밥알 한 톨 안남기고 싹싹 다 긁어먹으니 배까지 부르군요. 포만감에 괜스리 행복해지기까지 합니다그려. 진하게 타 온 블랙커피를 희석시켜 마시는 디저트까지 곁들이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식사가 완성되었습니다.

 

     동해 방면에서 넘어 온 운무가 공룡릉을 넘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황홀한 광경이 펼쳐지는군요. 바위 끄트머리에 앉아 카메라를 삼각대에 얹고 타이머 설정하여 셀카놀이를 하는 여유도 부려 봅니다.



중청의 저녁 #1



중청의 저녁 #2



중청의 저녁 #3

     내일 새벽 일찍 일어나기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듭니다. 다행히도 제 침상 양쪽에 자리하신 분들은 코를 골지 않으시는군요. 온 몸에서 욱신욱신 느껴지는 크고 작은 통증을 하나하나 음미하는 사이 쉬 잠에 빠져듭니다.



     잠을 깼습니다. 시금털털하고 퀴퀴한 산장 특유의 냄새가 후텁지근한 공기에 실려 콧구멍으로 혹 몰려드는 것이 갑자기 느껴집니다. 메스꺼움과 갑갑증이 들어 바깥으로 나가 보기로 했습니다. 대피소 복도의 시계는 새벽 2시 반을 가리키는군요. 벽면엔 스마트폰 충전 시설과 와이파이 안테나가 빼곡합니다.

     대피소 밖 대청봉 자락의 서늘한 공기기를 폐부 깊숙히 들여마십니다. 하늘을 보니 아 이게 웬일입니까? 깜깜한 어둠을 배경으로 수많은 별들이 총총합니다. 구름이 완전히 걷힌 것입니다. 급히 침상으로 달려가서 카메라와 삼각대를 가져 나왔습니다.


 

     삼각대에 카메라를 세팅하고 먼저 속초항의 불빛을 잡아 보았습니다.

 



    이어 별을 찍어보기로 했습니다. 중청대피소 헬기장으로 나와 중청봉을 배경으로 카메라를 세팅하고 25초 장노출로 별을 잡아보았는데, 썩 만족스럽진 않지만 그런대로 나쁘진 않군요.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별 궤적 사진도 한 번 시도해 보아야겠습니다.

     다시 침상으로 돌아 가 잠시 눈을 붙임으로써 첫 날이 지나갑니다. (제 1일차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