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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해외여행

동유럽 둘러보기 - 《제4일 : 비엔나》



동유럽 둘러보기 - 《제4일 : 비엔나》








아침에 일어나니 주위가 매우 소란하다.

투숙했던 호텔이 간선도로변의 24시간 운영하는 휴게소와

주유소를 겸한 곳이라 자동차 소음과 이동하는 사람들의 소음이

끊이지 않는다.


어쨌든 호텔 조식을 마치고 다시 버스를 타고 빈으로 이동한다.







 


빈(비엔나)에 가까워지니 교통체증이 발생.

다행히 오래 가진 않았다.








국회의사당이 차창 밖으로 휙 지나간다.










도착하자마자 점심시간이 되었다. 한인식당에서 중식 후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빈 新 市廳舍였다.


빈 시청사엔 "빈 필름 페스티발 2013"의 무대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 페스티벌은 매년 여름 2달간 매일 저녁에 열린다.

각종 오케스트라 공연, 오페라, 발레, 독주회 등 클래식 음악 뿐 아니라

팝, 재즈, 기타 대중음악 등 다양한 장르에 걸친 퍼포먼스를 녹화하여

2006인치 대형 스크린에 쏘아 보여주는데

벌써 20년이 넘었다고 한다.








입구 왼쪽에 붙어 있는 프로그램을 보니

오늘(8/4)은 로시니의 오페라 "신데델라", 

내일(8/5)은 바그너의 반지 4부작 중 

"신들의 황혼" 공연이 예고되어 있는데

움직일 수 없는 일정에 꽁꽁 옭아 매인 몸이라 

아.깝.따.









공연이 열리지 않는 낮시간엔 광장 맞은편에 설치된 주점에서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마시면서 뮤지션들의 라이브 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

물론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주점은 운영된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수학했던 빈 대학이

신 시청사와 지근거리에 있다.










빈의 상징, 성 스테판 대성당.


보헤미아의 왕인 오토2세에 의하여 1147년 공사를 시작,

약 63년만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처음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이후 화재로 전소된 것을 복원하였다가

1367년 합스부르크 왕가가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을 완전히 헐어버리고

높은 첨탑을 가진 고딕양식으로 개축하였다.


이후 오스만투르크군에 의해 파괴되기도 하고

2차 대전의 난리통에도 화재로 내부가 전소되었으나

국민 성금으로 1948년 중건되었다.


모짜르트가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고, 

쓸쓸한 장례식을 치른 곳이기도 하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별도의 입장료는 받지 않는다.







웅장하고 화려한 고딕 양식의 기둥과 천정, 벽화에서 눈을 뗄 수 없다!

성당 지하에는 역대 왕들의 시신을 안치한 카타콤베가 있는데

상당한 규모라고 한다. 내려가 보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시간의 촉박으로  이렇게 내부를 한바퀴 휘둘러보고 

빠져나오는 데 만족해야 했다.









과연 빈의 상징답게 광장엔 수많은 관광객들로 북적였고










광장 한켠에는 이집트 군사정권의 만행을 알리고 

군부의 즉각적인 퇴진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무함마드 무르시를 지지하는 이집트인들의 시위가 한창이었다.









최연소(?) 무르시 지지자









시위장에 경찰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것이 신기했다.

오히려 그래서 평화적 시위가 가능한 것인지?


역시 시위란 깨어진 보도블럭 쪼가리와 불 븥은 몰로토프 칵테일이 휙휙 날아다니고  

펑펑 터지는 최루탄에 눈물, 콧물 범벅이어야 제맛인데...ㅎㅎ








호텔 "사커(Sacher)"의 토르테와 멜랑쥬를 먹어보지 않고선

비엔나 여행을 한 게 아니라는 말에 혹하여 

제법 멀리 떨어진 이 호텔을 찾아 나섰다.









호텔 사커의 "사커 토르테(Sacher Torte)"


토르테란 케익의 독일어인데, 1832년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메테르니히의 요리사인 프란츠 사커가 

초콜렛을 올린 살구잼 케익을 처음 만들어 호평을 받은 후

그의 아들이 지금 이 자리에 사커 호텔을 짓고 까페를 열어 

"사커 토르테"를 판매하여 크게 흥한 후, 

비엔나를 찾는 관광객들의 필수 순례코스가 되었다.


먹어 보니 내 입맛이 저질이라 그런지 동네에서 흔히 살 수 있는

초코케익과 별 다른 차이를 못느끼겠더라마는,


아마도 일본인들의 유별난 집착이 이것을 유명하게 만드는 데 

한 몫 하지 않았나 한다.


이 곳을 찾아가서 긴 줄을 서서 대기한 끝에 마침내 한 조각 맛보고 오느라

성 스테판 성당을 자세히 둘러 볼 기회를 날려버렸다. 젠장.









스테판 성당으로 돌아오는 거리의 까페 풍경










쓰레기통도 찍어보다.









이 강은 도나우의 지류다. 그리 멀지 않은 상류와 하류에서

본류인 도나우와 다시 합쳐지는데, 비엔나의 청계천이라고나 할까.


건너편 江岸에는 파라솔과 돗자리를 펴고 비치 의자에 누워서

해수욕이 아닌 강수욕을 즐기는 빈 시민들이 보인다.

바다가 없는 오스트리아라, 이해는 가지만, 문득 드는 측은지심은 어쩔 수 없다. 






 


무슨 의미의 그림일까? 









150년 된 낡은 전차와 최신형 전차가 섞여 다니는 빈 시내.






다음 일정은 합스부르크 왕가(The House of Habsburg)의 몰락과 함께 한

쉔브룬 궁전 투어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부르봉 왕가, 로마노프 왕가와 더불어 

유럽 3대 왕가로 일컬어진다.

그 중 합스부르크 왕가는 원래 지금의 스위스의 한 산악지대, 

합스부르크 성을 중심으로 출발했던 가문에서 기원하였다. 

지금은 스위스에 속하지만 당시에는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였다.


처음엔 별 볼일 없던 합스부르크家는 이후 점점 세력이 커지면서 영향력을 확장,

현재 독일의 남서부 및 신성로마제국의 동남부(지금의 오스트리아)까지

손에 넣으면서 융성해 간다.

한창때는 지금의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헝가리, 보헤미아, 크로아티아,

폴란드 일부, 루마니아 일부, 스위스 일부, 벨기에, 네덜란드, 리히텐슈타인,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 사르데니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이 

직접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에 속했으며, 이탈리아 북부, 프랑스,

발칸반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니 참으로 대단한 위세였다.


이는 대부분 전쟁 외 각국 왕실과의 정략결혼 정책을 통해 

주위 영토를 야금야금 편입하여 늘려온 결과다.









《쉔브룬 궁 입구》


합스부르크 가문이 유럽 통치의 전면에 부상하게 된 것은

1273년, 가문 內 루돌프 백작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된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으며  

그로부터 나폴레옹이 신성로마제국을 무너뜨릴 때까지 

거의 600년 이상을 제국을 통치하며 넓은 영토를 관장하였다.










《쉔브룬 궁 대문. 중간에 매를 형상화 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紋章이 보인다》


쉔브룬(Shoenbrunn) 궁은 1612년 마티아스 황제가 사냥 도중 발견한

아름다운(Schoen) 샘물(Brunn)에서 유래하였다.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와 적대적 라이벌관계를 유지하던 황제는

파리의 베르사이유 궁보다 더 크고 화려한 궁전을 건축하려

베르사이유를 벤치마크하여 설계하였으나, 이후

경제사정의 악화로 지금의 규모로 줄여 축조하여

왕가의 여름 별장으로 사용하였다.








  



정원의 정 중앙 언덕 위 먼 곳에 글로리에테가 서있다.

글로리에테는 1775년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합스부르크 왕가 찬미를 위하여 건축이 계획되었으며

현재 이곳에는 카페가 들어와 있어 관광객이 찾는 주요 공간이자

빈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다.


시간의 압박으로 근처에 접근해 보지도 못하고 돌아 나와야 했다.









궁전에서 글로리에테를 잇는 중앙 화원의 양편으로는

기하학적인 배열에 따라 유럽식의 정원이 잘 꾸며져 있다.









곳곳에는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고 갖가지 기화요초들과 더불어

벤치가 있어 관광객들이 잠시 쉴 공간을 마련해 주고 있다.









걷보기와는 달리 궁전 내부는 입이 벌어질 정도의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되어 있었는데 

촬영을 엄격히 금하고 있어 남은 사진이 없다.


내부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총 1441개의 방 중 47개만 관광객들에게 공개하고 있다고 한다.


화려했던 합스부르크 왕가도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패한 이후 급격히 쇠락하였고

1918년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당시 황제였던 카를 1세가 이 곳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종말을 선언한 치욕의 장소이기도 하다.










오스트리아 역사탐방(?)이 끝나니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다.

비인의 맛집(가이드 왈)인 "볼프(Wolff)"로 이동하여 

비엔나식 스테이크를 맛보다.

주인이 중국계인듯.








느끼한 맛에 대한 편견만 버리면 괜찮은 음식이었다.

이 집에서 직접 빚었다는 맥주맛이 꽤 깔끔하고 좋았다.

맥주 이름은 잊어버렸다.


구글에서 이 집을 검색해 보니 2명이 평가를 해 놓았는데,

불친절한 서비스 등으로 최악의 등급을 매겨놨더라. 






다음은 마지막 오늘의 코스인 빈 음악회 공연을 보러 가는것이다.

80유로짜리 옵션 상품인데, 인솔자가 33명의 인원을 대상으로

 공연 참여 의향을 조사해 보니, 우리 부부 포함 달랑 4명 뿐이라고 했다.


옆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어보니,

뜨내기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음악회의 수준이란게 

안 봐도 비디오가 아니겠느냐면서 

차라리 서울에서 5만원짜리 공연을 보는 것이 훨씬 나을거란다.


이런 여론(?)엔 상관없이 나는 일찌감치 공연 참가를 결정해 놓은 터였다.

사실 드레스코드(Dress code)도 따지지 않고

반바지에 샌들 차림으로 듣는 음악회의 수준이 

아주 높을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내게 필요한 것은 다른 곳에선 맛볼 수 없는 지적 탐험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투어 버스에 탑승한 화려한 언변의 현지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난 후엔

참가 희망자의 수가 29명으로 확 늘어나 있더라.








이 음악회는 18-19세기 유럽에 유행했던 살롱 음악회의 형식을 따른다고 한다.

10~12명의 소편성 오케스트라에 성악가, 무용가를 피처링하여 

인터미션 포함 약 2시간 동안 공연하는 스케줄이었고,

위 사진에서 보듯 샴페인 한 잔씩이 제공된다.







 


인터미션에 제공된 샴페인 한 잔








팸플릿을 5유로에 팔기에 하나 샀다.









무대 세팅









사회자가 나와서 인사와 더불어 이 음악회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특히 솔로 바이올리니스트 게를린데 존라이트너의 

1682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의 소리를 들려 줄 수 있어서

매우 기쁘다고 했다.










오늘의 게스트 명단









소규모 원형 음악홀은 반향이 꽤 훌륭하였다. 









무대에 등장한 "비엔나 레지던스 오케스트라"의 단원.


첼로, 콘트라베이스, 제1, 2, 3 바이올린, 비올라, 바순, 

플룻, 오보에, 클라리넷의 소박한 소편성이다.

아마도 저녁 살롱에서 친구들을 초청하여 만찬을 들며 감상하기 딱 좋은 규모다. 



중간의 여성 바이올리니스트가 들고 있는것이 바로 

1682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


1부엔 모짜르트의 "코지 판 투테" 서곡 외 5곡

슈베르트의 교향곡 5번 1악장이 연주되었고,


2부는 요한 스트라우스 2세의 "남국의 장미"등

빈 왈츠 음악 9곡이 연주되었다.

빈 신년 음악회에서 보듯, "트리치 트라치 폴카"를 연주할 때는

청중들이 박자에 맞추어 손뼉을 치며 참여하도록 유도하여

신나는 시간이 되었다.


공연 도중엔 촬영할 수 없기에 사진이 없다.


내 막귀로는 연주가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공연 종료 후, 청중들의 열화(?)같은 앵콜에

솔로 바이올린 주자와 소프라노 가수가 나와서 화답하고 있다.


두 곡의 짤막한 앵콜곡을 연주한 후 모든 일정이 끝났다.

최소한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공연장 바깥으로 나오니 이미 밤이 깊었고,

비엔나의 밤거리엔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동유럽 둘러보기 - 《제4일 : 비엔나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