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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해외여행

서안(西安) 역사기행 #6 - 병마용갱과 진시황릉






서안(西安) 역사기행 #6 - 병마용갱과 진시황릉




       올해 여름은 참 많이 더웠다. 10년째 에어컨 없이 버티고 있는 우리집은 더욱 힘든 여름이었다. 더워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컴퓨터 앞에 앉았을 때 도무지 집중이  안된다는 것이다. 중국 여행 다녀온지도 3주가 넘어가는데, 벌써 정리가 끝났어야 할 여행 기록이 그놈의 더위 덕분에 이제 겨우 절반쯤 밖에 오지 못했다. 그래도 더운 것은 참겠는데,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온 몸을 스멀스멀 뒤덮어 오는 끈적한 습기다. 휴가 기간 중 집에 있을 땐 하루에 샤워를 4번, 5번을 해도 그때 뿐, 물기 닦은지 채 5분도 되지 않아 샤워 전 상태로 되돌아가니 멘붕 직전까지 가게 된다. 뒷머리에서 발원한 땀이 목덜미를 거쳐 등 쪽으로 땀줄기를 규합하여 제법 굵은 흐름으로 스멀스멀 흘러내릴 때면 무슨 징그러운 벌레가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것 같아 불쾌하기 짝이 없고, 그럴 땐 글이고 뭐고 만사가 귀찮다. 이젠 나도 에어컨이 필요한 나이가 된 것일까? 더우면 더운대로 사는 게 자연스러운 거라고 외치던 내 어설픈 자연주의를 폐기할 때가 된 것일까?

 

       처서(處署)가 지나면 모기 주둥이가 비뚤어지고, 풀이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처서에 비가 오면 그 해 놓사를 망친다고도 한다. 어릴 적, 전기가 안들어오던 시골 고향의 여름 밤, 더위에 잠 못 이루고 괜히 잠 투정을 부리던 내게 할머니는 내 벌거벗은 등 위로 부채를 살랑살랑 부쳐 주시면서, "야야, 처서만 지나모 고마 쌀랑해진단다. 세 밤만 더 자면 처서다. 쪼꼼만 참아라이~"라고 달래곤 하셨다.  처서는 더위를 많이 탔던 내겐 더위를 쫓는 부적이나 마찬가지였다. 내 처서는 비뚤어진 모기주둥이도, 더 이상 자라지 않는 풀도, 흉년을 예고하는 비도 아니요, 할머니가 내게 해 주었던 가을의 약속이었던 거다. 

      

       오늘이 처서다. 엄동에 우수 경칩 기다리듯 맹하(猛夏)에 가장 반가운 것이 입추 처서다. 이제 컾퓨터 앞에 앉아도 더 이상 땀이 줄줄 흐르지 않는다. 처서는 천상 처서인 모양이다. 옛 할머니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물론 더위가 완전히 물러건 것은 아니다. 인디안 섬머라는 것도 있지 않은가? 그래도 처서란 더위를 감내하는 심리적 마지노선이서, 처서가 와 주니 참 반갑고 고맙다.

 

       오늘은 드디어 이번 서안 역사기행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병마용갱과 보너스인 진시황릉을 둘러 볼 차례다. 병마용을 이야기하려면 진시황을 말하지 않을 수 없고, 또 진시황을 말하려면 킹 메이커(엠퍼러 메이커라고 해야 하나?) 여불위와 그 주변 인물들을 빠뜨리지 않을 수 없음이니, 좀 장황하더라도 약간 소급해서 그 시대의 배경부터 짚어보기로 한다. 

 

       기원 전 300년 쯤인가? 그간 오랫동안 형님국가로 섬기던 주나라가 쇠약해지면서, 소련 공산당의 몰락과 함께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듯,  제후국가였던 秦, 韓, 齊, 魏, 趙, 燕, 楚라는 전국칠웅(戰國七雄)은 주 왕실에 반기를 들고 각자 독립 왕국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영토 확장에 열을 올리며 전쟁을 밥먹듯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진나라 소양왕의 손자인 영 이인(嬴 異人, 후에 子楚로 개명)이 조나라에 볼모로 가 있었다. 진나라는 자국 왕손이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 없이 조나라를 공격하였기에, 조나라는 이인에게 형편없는 푸대접을 했던 모양이다. (하기사 20명이나 되는 아들 중 한둘이 없어진다고 눈 깜짝할 그들이 아니겠지) 이인은 적국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모와 고초를 겪으며 힘든 생활을 해야 했지만, 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 때, 조나라 출신의 거대 재벌인 여불위(呂不韋)가 우연히 이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타고난 장삿꾼 감각으로 이인이 예사로운 인물이 아님을 직감한다. 그는 당시 전국 칠웅국을 돌며 국제 무역업으로 막대한 부를 끌어모았지만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신분 서열상 국가 핵심 리더쉽 그룹에 진입 자체가 불가능하였는데, 이인을 잘 키워 본인의 신분 상승을 위한 발판으로 삼기로 하고, 그를 天子로 만들기 위한 거대한 프로젝트에 돌입한다.

 

        먼저 이인을 '공자'라 부르며 진 왕손으로 극진히 대하고 갖은 접대와 향응을 제공하니 그간 찌그러져 살던 그는 황송함에 어쩔 줄 몰라한다. 이어 집과, 돈 등 각종 편의를 통 크게 베풀고 제왕학을 가르치는 동시에 자신의 애첩인 조희(趙姬)까지 그에게 붙여 주니 외로웠던 이인은 여불위를 백골난망의 은인으로 여기게 된다. 사마천의 <史記>에 의하면, 여불위가 조희를 이인에게 보낼 당시, 이미 조희는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고 한다.

 

       소양왕의 세자인 안국공에겐 화양부인이라는 초나라 출신 정실 부인이 있었는데 슬하에 아들이 없었다. 여불위는 화양부인을 찾아 가 갖은 금은보화를 뇌물로 바쳐 환심을 산 뒤, 이인을 양자로 들이기를 은근히 부추긴다. 후궁 소생이 왕위를 이으면 나중 화양부인의 위상이 흔들릴 뿐 아니라 어쩌면 안위까지 보장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반 협박까지 동원하면서 말이다. 화양부인은 이 설득을 받아들이고, 여불위는 조나라로 돌아 와 공손건에게 뇌물을 바쳐 이인을 데리고 조나라를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여불위는 이인을 안국공에게 소개하고 아울러 화양부인을 만나게 하는데, 이 때 여불위는 이인에게 초나라 의복을 입게 한다. 초나라에서 시집 온 화양부인은 늘 고국을 그리워하였는데, 양자가 될 이인이 초나라 복식을 하고 알현하니 감격하여 이름을 자초(子楚)로 바꾸게 하고 양자로 받아들인다. 그로서 이인은 안국공에게도 적자로 인증받게 된다. 여불위의 주도면밀하고 치밀한 작전이 성공을 거두는 순간이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진 소양왕이 죽고, 뒤를 이어 안국공이 왕위(효문왕)에 오르는데 효문왕은 몇 달도 못 가서 급사하고 만다. 이를 두고 여불위의 독살설이 파다하게 퍼지지만 곧 묻히고 만다. 이후 여불위의 적극적인 행보에 힘입어 정실 화양부인의 양자인 이인(자초)를 왕위(장양왕)에 옹립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인이 왕이 되니 조나라 화류계 텐프로 출신이었던 조희는 덩달아 왕후가 되며 졸지에 신분상승을 하게 된다! 


       왕이 된 자초는 여 불위에게 파격적인 보은을 하는데 먼저 그를 승상의 위치에 앉히고 낙양에 엄청난 규모의 식읍을 하사하니 그로부터 여불위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이런 효문왕 자초마저 즉위 후 2년을 못채우고 급사하니 조희의 소생인 태자 영정(嬴政)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데, 그가 나중 진 시황이 된다. 영정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기때문에 친정체제를 구축할 수 없어 재상이던 여불위가 섭정하면서 모든 국사를 대행하였다. 당시 새로 왕이 된 영정이 사실은 여불위의 자식이라는 소문이 온 나라에 퍼지고, 여불위도 본인이 왕의 생부임을 은연 중 내비치곤 했는데 왕실의 체면상 대 놓고 그럴 순 없어서 왕의 중부(仲父; 작은아버지)라 공공연히 말하고 다니며 권력을 과시하였다.


       과부가 된 조태후 조희 또한 중국 역사상 희대의 스캔들의 중심에 서게 된다. 여불위는 이인에게 조희를 바치고 나서도 그녀와 지속적으로 은밀한 만남을 가졌다. 40을 갓 넘어 홀로된 조희 또한 갖가지 이유를 붙여 여불위를 침소로 불러들였다. 아무리 천하의 여불위라 한들 과부가 된 태후의 처소에 들락거리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것이요, 60을 훌쩍 넘은 노인의 몸으로 조희의 유난히 왕성한 색욕을 충족시켜 주기도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묘책을 낸 것이 바로 미남계다.


       그 당시 노애라는 대장간 출신 청년이 있어 꽃미남인데다가 거대한 양물의 소유자로 장안에 소문이 자자하게 나 있었다. 여불위는 노애를 조희에게 소개해 줬는데 조희 또한 크게 만족하는지라, 그를 내시로 위장시켜 조희의 지근에 거하며 밤낮으로 시중(?)을 들게 한다. 죽이 맞은 태후 조희와 노애는 아예 궁을 떠나 옹주에 버젓이 살림을 차려 2명의 아들까지 두게 되는데, 노애는 태후의 후광을 업고 장신후라는 벼슬과 매우 많은 상금을 하사 받하 하인이 천 명, 식객이 천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리 되자  권력 과시욕이 발동하며 본인이 왕의 아버지뻘 되는 사람이라고까지 떠벌리는 지경이 되었다. 장차 자기의 자식을 왕으로 만들려는 음모를 꾸민다는 소문도 돌았다. BC 238년, 영정이 성인식 행사로 잠시 함양을 비운 사이에 노애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영정을 즉각 군사를 보내어 제압한 후 그를 능지처참하고 두 아들도 참살함과 동시에 노애의 삼족을 멸해버린다. 태후 또한 함양궁에 유폐시켜버린다. (나중에 풀어주었다고 한다)


       노애의 난이 평정된 후 이 스캔들과 반란의 원인이 모두 여불위에게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왕은 여불위까지 잡아 죽이려 하였으나 여불위의 그간의 공적을 봐서 죽음만은 면케 해 달라는 주위 신하들의 간곡한 건의를 받아들여 여불위의 모든 관직을 파하고 하사했던 녹봉을 모두 박탈해버린 후 여불위의 모든 가족이 촉으로 떠날 것을 명한다. 여불위는 자기의 천운이 다했음을 깨닫고는 독주를 마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러한 태후의 밀통 스캔들은 왕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로 작용했고, 진 시황은 평생 어머니에 대한 콤플렉스에 시달렸다고 한다.  (영정이 과연 여불위의 친자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다. 사마천의 <사기> 여불위전에는 여불위가 시황 영정의 친부라고 밝히고 있지만, 중국 근대 사상가인 곽말약은 여불위 친자설은 여씨들이 꾸며 낸 말이라고 주장한다. 거 참, 진시황 무덤을 빨리 파헤쳐서 DNA 검사라도 해 봐야하나?)   


       여불위가 죽음으로써 비로소 친정 체제를 구축한 영정은  먼저 군사력을 강화하여 변방의 제후국을 차례로 복속시켜 나가기 시작한다. BC 230부터 중국 통일 프로젝트에 착수하여 한(BC230), 조(BC228), 위(BC225), 초(BC223), 연(BC222)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마침내 BC221년, 제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그의 나이 38세에 중국땅을 통합하는데 성공한다. 통일 이후에는 제후들의 거센 저항을 누르고 봉건 봉건제를 폐기, 군현제를 실시함으로써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하여 세계 최초로 근대적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는데 이는 유렵보다도 1800년이나 앞선 것이라고 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정치질서의 기원") 이는 시황이 법가사상을 받아들여 법치주의를 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천하를 통일한 시황은 과감하고 강력한 개혁을 추진한다. 당시 중구난방이었던 도량형과 화폐, 문자를 통일하였고 심지어는 마차 바퀴의 폭까지 통일하였다고 하니 현대 사회에서도 달성하기 어려운 글로벌 표준을 성공적으로 제정하고 시행하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상의 통일까지 이룩하려 했던 시황은 "통일작업"의 무리한 추진으로 스스로 단명을 초래하게 된다. "폭군 진시황"의 이미지를 굳히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분서갱유(焚書坑儒)사태는 사상의 통제가 얼마나 어려운것인지 보여주는 사례다. 사사건건 대의와 명분(先王之道)을 앞세우는 유가(儒家)의 일각에서 시황의 제1 정책인 군현제를 비방하고 주나라의 봉건제도로 회귀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자가 있었는데, 황제는 유가의 라이벌이었던 법가 사상가(상앙, 이사, 한비자 등)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론 분열 방지를 명분으로 의학, 약학, 복학(卜學), 농사 관련 서적 이외에 모든 민간 소장 서적을 수거하여 불태웠다(焚書). 그리고 황제에게 비판적인 유학자 460명을 생매장(坑儒)했다고 전해지는데, 이에 대해서는 사실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는 것 같다.

 

       진시황의 불로장생에 대한 집착은 잘 알려져 있다. 자신이 이룩한 통일제국이 영원히 지속되고 자신도 영생을 누리기를 바라며 수많은 방사, 술사들을 동원하여 불로초를 찾아오라고 명하는데, 특히 도술에 능한 서복에게 삼천 동남동녀(童男童女)와 수만금의 재물을 주어 동해 바다 건너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산 등 삼신산(三神山)으로 불로초를 구하러 보냈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는 전설이 유명하다. 봉래산은 금강산, 방장산은 지리산, 영주산은 한라산에 해당하며, 이 세 산 모두 삼천 동남동녀에 얽힌 전설이 아직도 내려오고 있다.


       그의 집념도 헛되이 기원 전 210년, 전국 순회 도중 병을 얻어 사막에서 허망한 죽음을 맞이하는데 그의 나이 50이다. 시황 사후 진2세, 3세황들이 황위를 계승하지만 이미 조정은 간신배들의 손에 넘어간 이후라, 조고 등 환관들이 국정을 마음것 농단하니 나라가 혼란에 빠지는데, 진 제국 말기 봉건제의 부활을 원하던 지방 토호 및 구 6국의 귀족세력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결국 진나라는 통일 후 15년을 넘지기 못하고 멸망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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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황릉 참관에 앞서 먼저 시황의 지하궁전을 둘러보았다. 진시황릉은 아직 미발굴인 채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데 성급한 발굴로 유물이 돌이킬 수 없는 훼손을 입을 가능성이 크다는 중국 당국의 신중함의 결과이다. 향후 신뢰할 만한 기술이 나올 때까지 발굴을 보류하여 후손들의 숙제로 남겨두겠다고 한다. 대신 <사기> 등의 역사서를 참고하고 상상력을 동원, 가상 왕릉을 지어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고자 했는데 이것이 진시황 지하궁이다. 

       




진시황 지하궁 = 泰陵地宮



       내부가 너무 어두워 10년 된 내 고물 카메라로는 찍을 방법이 없어 사진 촬영은 하지 않았다. 시황은 생전에 통치하던 그 시절의 환경 그대로를 지하 세계에 완벽히 구현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무덤 내부의 모든 구조는 당시의 황궁을 그대로 재현하여 축조해 놓았을 것으로 추정하여 지하궁을 꾸몄다. 따라서 궁의 모든 건물, 시설물, 신하, 궁녀, 내시, 군사, 마필, 무기 등이 미니어처로 만늘어져 각자 위치에 맞게 안치되어 있다. 중앙부엔 시황의 청동 棺이 놓여 있고, 이 청동 관이 둥둥 떠다니도록 만든 수은의 강부터, 내성, 외성, 동서남북에 배치된 병마용까지 잘 꾸며 놓았다. 하지만 입장료를 의식해 날림으로 지은 느낌이 많이 들었고, 지은 지 오래 되어 여기저기 낡은 흔적이 나타났다. 당국은 제 2의 장소에 규모를 키우고 좀 더 정교하게 다시 짓는 계획을 추진한다고 한다. 가짜 궁이긴 하지만, 발견 전까지는 전설과 역사서로만 내려 오던 황릉의 모습을 가상으로나마 느끼고 이해하는데는 도움이 되었다.

 

 

 

  

 

 

 

    

  태릉지궁 관람 후 인근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다. 사진은 우리 좌석 옆 중국인(대만인들 같았음) 관광객들을 위해 차려진 음식이다. 여행 기간 내내 대체로 저것과 비슷한 식사가 나왔다.  

 

 

 

 

 

식사 후 병마용갱 가기 전 잠시 쇼핑몰을 들렀는데, 다른 사람들이 쇼핑몰에 있는 사이 혼자 길거리로 잠깐 나와 이 곳 저 곳 둘러보다.

 

 

우리 초등학교 시절만 하더라도 저런 삼륜차가 흔히 보였는데,,, 주로 연탄 배달용이었던가?

 

 

 

길거리에 심어진 이름모를 과일나무. 먹을 수 있는 것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짝퉁의 천국답게 BMW틱한 마이크로 승합차도 보였고

 

 


 

 

        병마용 공장도 눈에 띈다.

 

 

 

 

시황릉 입구에 도착하니 거대한 진시황 석상이 우릴 맞는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임을 알리는 표석 뒤로 야트막한 야산이 하나 보이는데이 야산 전체가 진시황의 봉분이다. 시황은 생전에 본인 사후에 들어 갈 지하궁 건립을 엄청난 자금과 인력을 동원하여 착수하였다. <史記>에 의하면 진시황릉이 제시한 컨셉은 '사사여생(死似如生)'이었는데, 지금 사는 곳과 똑 같이 지으라는 의미다. 이에 신하들은 고민하다가 당시의 궁전을 그대로 복제하기로 결정하고 70만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대 공사에 착수하였는데, 위 사진에 산처럼 보이는 것은 봉분의 일부일 뿐이다. 지상 궁전의 규모가 자금성 전체의 78배에 달하고 지금 마카오 땅의 3배 규모의 면적이라 하니 참으로 어마어마하다. 지상 부분의 높이는 115m 정도로 이는 30층 건물 높이와 맞먹는다. 궁 밖에는 일반 백성들의 거처도 만들어 재현했는데, 이곳은 현재 발굴이 진행중이라고 한다.

 

 

 

 

 

     

               지하 궁전은 지하 35m~50m의 깊이에 축조하였으며 여기에 중국의 땅 형상을 재현하고 양강엔 수은을 채워 시황의 청동관이 둥둥 떠다니도록 했다. 엑스레이 측정시 실제로 많은 수은 성분의 존재가 감지되었다고 한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다는 인어 기름으로 등불을 밝히고, 벽과 천장은 보석을 무수히 박아 별과 달로 삼았고 통로엔 자동 발사되는 활과 화살을 설치하여 무단 침입자에 대비하였다. 그는 사후 무덤이 도굴될까 염려하여 무덤 외관을 산으로 보이게끔 나무를 심어 위장하고, 여산이라 칭하였다. 비밀을 지키기 위하여 왕릉 건축에 동원되었던 인부를 모두 생매장하였다고 한다. 덕분에 시황릉은 1974년 한 농부에 의하여 병마용이 발견될 때까진 그 위치 뿐 아니라 존재조차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사실 발굴 초기만 하더라도 이것이 진시황릉인지에 대해서는 반신반의, 확신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불위의 지휘로 만들었다는 명문을 새긴 동극(銅戟; 창의 일종)이 출토됨으로써 학계에서는 비로소 진시황의 무덤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시황릉은 미발굴 상태라 더 볼 것이 없어 발길을 병마용갱으로 옮긴다. 일부 드러난 병마용갱을 발견 당시의 상태 그대로 두고 그 자리에 "진시황병마용박물관"을 세워 전 세계의 수많은 관람객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중국이 자랑하는 유적답게 세계 각국으로부터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병마용갱은 중국이 문화혁명의 광풍에 한창 휩싸여 있을 1974년, 밭에서 우물을 파던 농부들에 의하여 우연히 발견되었다. 그 이전에도 이 지역을 파 헤치면 다량의 화살촉과 벽돌 등이 흔히 나오곤 했는데, 농부들은 파 낸 화살촉 등을 무더기로 보유하고 있다가 고물장수에게 kg 단위로 달아 헐값에 팔아넘기곤 했다. 벽돌은 주민들이 집으로 가져 가 베개로 활용했다는데, 무덤 속에 있던 벽돌을 베고 자면 잡귀가 못쳐들어 오고 병이 치유된다는 미신을 따른 것이다. 발견 당시, 마침 휴가차 고향에 와 있던 이곳 출신 신화사 통신의 한 기자가 소문을 듣고 와서 확인 후 "2000년된 진시황의 병마용이 발견되었는데 적절한 보호 없이 방치되고 있다"라는 내용의 특종보도를 하자, 주은래의 지시로 섬서성 고고학발굴팀이 군대를 동원해서 발굴작업을 시작함으로써 세상에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금껏 3개의 갱을 발굴하였고 6천여 구의 도용(陶俑)과 100대가 넘는 전차, 40여필의 말, 10만여개의 병기가 출토되었으며 지금도 계속 발굴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병기는 대부분이 실제 무기이며 보존 처리 중으로, 아직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병마용갱은 총 3개의 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1호갱은 당시 농민이 처음 발견한 것이고, 후에 2, 3호갱이 차례로 발견되었다. 1호갱은 세 곳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동서 길이가 약 230m, 남북으로 약 62m로 총 면적이 12㎢ 정도이다. 1호갱은 동서 쪽을 향한 긴 모양으로 장군과 병사가 배열되어있고, 2호갱은 면적이 약 6000㎡이며,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2호갱은 발굴이 되고 있는 상태에서 전시되어 있다. 3호갱은 면적이 520㎡으로 凹모양이며, 병마용들은 양쪽으로 늘어서 있다. 역시 현재까지도 발굴 작업이 진행중이다. 학자들은 발견된 3개의 갱 외에도 진시황릉 근처에 아직 발굴되지 않은 더 많은 병마용갱이 묻혀 있을 거라고 보고 있다.

  

 

 

아래는 1호갱의 모습이다.

카메라를 난간에 밀착하여 최대한 흔들리지 않으려 애쓰며 찍었다. 무더위로 온 몸이 땀으로 범벅 --;

 

 

 

 

 

 

 

 

 

 

 

 

 

 

 

 

 

 

 

 

 

 

 

 

 

 

 

 

 

 

 

 

1호갱 중 아직 미발굴 지역이다.

 

 

 

 

파손된 도용을 수리, 복원하고 있다.

 

 

 

 

 

수리, 복원중인 도용 (1)

 

 

 

 

 

수리, 복원중인 도용 (3)

 

 

 

 

 

2호갱

 

 

 

 

 

2호갱

 

 

 

 

 

 

갱 옆에 전시된 실물 병사 도용.

실물보다 20~30% 크게 제작되어 있고, 원래 채색되어 있었으나 지상으로 노출되자마자 색채가 사라졌다고 한다.

 

 

 

 

 

 

 

갑주와 투구를 쓴 도용. 당시의 전투 복식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다.

 

 

 

 

       병마용갱 발굴은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세계 고고학사의 획기적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당시 우물을 파다가 병마용을 발견했던 농부들이야말로 특등 공신인데, 오랫동안 공동 농장을 경작하다가 유적을 발견한 그들은 정부 주도의 발굴 작업이 시작되면서 헐값에 농토를 환수당하여 생계 수단을 잃고 곤궁한 생활을 해야했다. 이후에 이 곳이 관광지화 되어 세계 각국으로부터 엄청난 관광객을 끌어들이면서 당국과 관리들은 떼돈을 벌었는데, 정작 농부들에게 돌아온 댓가는 빈곤이라, 발견자 중 한명은 가난을 비관해 목숨을 끊었으며 2명은 실업과 병고에 시달리다 제대로 치료한번 못해보고 쓸쓸히 죽었다고 한다.  

 

       이들은 급기야 소송을 제기하였고, 당국이 그들에게 내린 특혜는 고작 박물관 내 기념품점에서 월 1천 위안을 받고 일하게 하는것이었다. 생존자인 양콴이와 양페이안은 기념품점에서 판매하는 병마용갱 기념 책자에 최초 발견자로서 서명을 해서 판매하는데, 즉석 친필 서명의 댓가가 우리나랏돈으로 1만원쯤 된다. 그 친필 서명이 엄청난 인기를 끌어서, 지금껏 단 하루의 휴일도 없이 계속 출근해서 일한다고.

 

 

 

 

   

     위 사진은 최초 발견자인 양 영감(맨 왼쪽)께서 친필 사인을 해 주려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다. 오른쪽의 젊은이는 그의 아들이며, 사진 오른쪽 끝에 일부만 찍힌 사람은 그의 며느리. 근접 촬영을 싫어하셔서 좀 떨어져 찍었더니 흔들렸다. 150위안(3만원)이나 하는 책자를 구입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길게 늘어 서 있었는데, 나중 관람 마치고 저녁 식사차 들른 식당 주변의 장삿꾼들에게 우리 일행 중 일부는 서명 안된 동일한 책자를 2권에 60위안에 샀다고 하더라.

 

       이상으로 진시황의 상징인 병마용과 시황릉을 둘러보았다. 진의 멸망 이후 중국은 다시 사분오열된 채 2천년이 흘렀고, 20세기에 와서야 마오쩌둥의 공산당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이라는 이름으로 대륙은 다시 통일되었다. 현재 통일 중국은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한 상태이며, 13억이 넘는 막대한 인구와 국가가 독점한 엄청난 富로 하여 그간 지구촌의 좌장 역할을 해 온 미국의 자리를 감히 넘보는 중이다.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시대에서 팍스 시니카(Pax Sinica)의 도래를 꿈꾸며 새로운 패권국가로서의 야심을 숨기지 않는 중국으로서는 시황의 진 제국이야말로 딱 접합한 롤 모델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진시황에 대한 중국인들은 애정과 존경과 자부심은 매우 각별하다.

 

       2002년, 중국 영화 사상 최대의 무협 블록버스터라고 알려진 장이머우(장예모) 감독의 "영웅"이 발표되었다. 중국 영화사상 최대의 제작비를 쏟아부어 만든 이 영화는 개봉 직후 중국에서 역시 사상 최대의 흥행 기록을 세웠고 세계적으로 엄청난 관객을 확보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도 흥행에 크게 성공하였다. 배역 또한 리롄졔(이연걸), 장만위(장만옥), 량차오웨이(양조위), 장쯔이(장지이), 첸다오밍(진도명), 견자단(전쯔단) 등 중화권을 대표하는 톱 스타를 총 망라하였고, 서방의 투자를 받지 않고 순수 중국 국내 자본만으로 제작되었다.

 

 

 

 

 영화 "영웅"의 포스터
그런데 왜 장쯔이만 "장지이"라는 한국식 발음으로 표기하지 않았을까?

 

 

 

 

영화 "영웅"의 한 장면. 톈진 출신의 "황제역 전문 배우" 첸다오밍(陳道明)이 시황 영정 역을 맡았다.

 

 

 

       "색채의 마술사"라는 칭호가 붙어다니는 장 감독의 작품 답게 영상미는 정말 빼어났다. 또한 큰 스케일과 특수 효과 등은 정말 너무랄 데가 없었다. 그러나 영화관을 나서면서는 씁쓸한 입맛을 다셔야 했다. 스토리는 간단하다. 진시황의 통일 전쟁 과정에서 시황에게 원한을 품은 4명의 자객이 시황 암살 계획을 세우는데, 그 중 가장 무공이 출중한 리롄졔가 다른 3명의 무사의 자발적 희생(죽음)을 발판으로, 철통같은 황실의 호위를 뚫고 진시황의 지근에 접근하는데 성공하여 시황을 죽일 수 있는 결정적인 찬스를 잡게 된다. 리롄졔는 오로지 이 순간만을 위해서 험난한 과정을 거쳐 무공을 연마했고 마침내 필생의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순간에 왔건만, 결국 그는 진시황을 향해 겨누었던 칼을 거두고 돌아선다.  

 

       왜 그는 최후의 순간에 필생의 업을 포기했는가? 진시황의 입을 빌어 장 감독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던진다. "개인의 원한 쯤은 사소한 것이다.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통일을 이루어야 평화가 오고, 그래야 백성들의 고통도 덜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천하를 위하여 이로운 길임을 깨달아야 한다." 지금 세계를 호령하는 패권국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려는 중국 지도부에게 필요한 것은 중국 인민들의 당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과 복종이다. 천안문 사건이나 파룬궁 수련자들의 조직적 세력化 등은 결코 있어서는 안될 위험천만한 행위이자 중국의 꿈을 갉아먹는 엄청난 해악인 것이다. 결국 진시황을 앞세워 당을 중심으로 한 중화사상으로의 대단결을 요구하고 있다.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인민들의 혹독한 탄압과 착취를 기반으로 세워진 이 유적을 그 피 압박 인민들의 후손들이 그토록 열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에서 참으로 형언키 어려운 역사의 아이러니를 본다.

 

    (이상 병마용갱, 진시황릉 관람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