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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

독서 :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

 

 

 

첫 장을 펼치는 그 순간부터 단숨에 완독해 버렸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떤 책을 이렇게까지 몰입해서 읽었던 적이 언제더라?

 

책의 저자는 프리랜서 다큐멘터리 작가이다.

연해주 북쪽의 아무르지방에 아직 명맥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아무르호랑이(한국호랑이, 시베리아호랑이, 조선범, 동북호)"에 관한 처절한 기록이다.

저자는 사람의 관점, 또한 호랑이의 관점에서

3대에 걸쳐 아무르 호랑이 가족이  살아가는 방식을 "인간극장" 형식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내가 호랑이가 되고, 호랑이가 내가 되는

그런 물아일체의 상태에서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이야기의 기록이다.

슬픈 기록이다.

 

내용 중 압권은

"왕대(王大)"로 표현되는 왕초 숫호랑이와 숲 속에서 우연히 조우하는 순간이다.

피차 만날 준비가 전혀 안된 상태에서 우연히 맞닥뜨린 두 동물(사람과 호랑이)은

극도의 긴장 속에서 시선을 교환하며 서로 견제한 채 

종래 서로 조금씩 양보하여 각자 갈 길을 가는 그런 장면!

 

깊은 산중을 홀로 걷다가 갑자기 호랑이를 만났다고 상상해 봐라.

 

한 호랑이와 한 인간이 우연히 마주치고,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복잡한 감정의 교류 끝에

아무 일 없이 각자의 길을 간다는 것,

나는 이 대목에서 "진실의 순간(the moment of truth)"라는 말을 떠올렸다.

스웨덴의 경제학자인 "리처드 노먼"이 처음으로 사용한 말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진실의 순간"을 가끔 경험한다.

그 진실한 순간의 바탕은 상호간의 신뢰다.

 

작가는 오랜 기간을 호랑이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연민을 갖고 추적해 왔으며

야생호랑이에 대한 위험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호랑이에게 감상적인 접근은 스스로 허용하지 않는다.

 

호랑이 또한 인간의 위험함을 학습으로 잘 알기에 평소 인간움직임을 먼저 간파하고 멀찌감치 피해서 활동한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그 위험한 인간을 마주치고선 크게 당황했을 것이다.

 다행히 이 호랑이는 이 사람을 "잘 알고"있다.

오랜 기간의 쫓고 쫓기는 추적을 통해, 이 작가가 호랑이를 관찰한 시간보다도

이 호랑이가 숲에서 은신한 채 저자의 관찰활동을 역으로 관찰했던 시간이 훨씬 많은탓에  

이 사람이 자기 종족에 적대적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는것이다.

 

둘이 만나는 순간, 두 동물간에 교류된 그 찰라적인 교감이야말로 진실의 순간이다.

신뢰만이 진실의 순간을 만든다.

 

스푸트니크나 스페이스 셔틀을 타고, 대기권 밖에서 관찰하는 우주도 있지만

산막에 구덩이를 파고 은신한 채 몇 달을 옴짝달싹 못하며

 한 뼘도 안되는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만 관찰한 숲 속 생활도

무한정 넓은 우주일 수 있다는 것을 웅변한다.

 

 


이 책을 알게해 준 L모씨에게 감사드린다.